나는 스무 살이다. 머리를 틀어 올려 묶고 버스에 타면 운전기사가 학생 요금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귀밑으로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아직 뺨에 젖살이 빠지지 않은 것이 다른 스무 살과 다를 바 없다. 굳이 차이를 들자고 한다면 내게는 남편이 있다는 사실 정도다. 남편은 대학근처 자신의 건물에서 서점을 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서점은 한때 사회과학 서적으로 유명했던 곳이라고 한다. 시절이 변하면서 운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던 서점을 건물주의 아들이었던 남편이 넘겨받은 것이다. 서점은 예전의 명성을 이어받지도 못하고, 특화된 분야도 없이 문만 열고 있을 뿐이다. 드나드는 사람이라고는 담배를 사러오는 손님들뿐이다. 그래도 남편은 물려받은 건물 덕분에 날마다 출근을 하고 내게 생활비를 준다. 출근이라고 해봤자 건물 사 층 살림집에서 일 층으로 내려가는 것이 전부지만 말이다.
내가 서점에 내려가 있는 날이면 어쩌다 들리는 손님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남편에게 조카냐고 물어보는 남학생들 심지어 따님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의 얼굴은 너무 익어 터질 것만 같은 토마토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곤 한다. 내가 재빨리 나서서 그의 아내라고 소개할 때 사람들의 눈에 스치는 당혹스러움을 남편은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둔다. 서점에는 스무 살 어린 아내와 살아가는 남편의 복잡한 감정들이 책 먼지와 같이 쌓여가고 있다.
내가 이렇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결혼생활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강신무당이다. 한때는 오방신장 장군님도 오시고, 용 할머니도 오시고, 가끔 아기동자도 왔지만 지금은 어쩌다 한 번 찾아올 뿐 신 내림의 기회가 거의 없는 퇴물 무당이다. 장군님이 들락거리고, 할머니가 하루에 몇 번씩 찾아올 때면 상위에 돈이 넘치어 흐르는 굿판을 예사로 벌였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사과, 배, 감귤, 감, 팥 시루떡, 산자, 부두전, 산적, 생선적, 부침개, 삼색 나물이 보는 사람 입을 벌어지게 하였다. 그때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올려놓은 상은 정말 볼만했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할머니가 예뻐지고 싶어서 거울만 본다고 타령하더니 얼굴을 뜯어고쳤다. 얼굴을 고치고 나니 장군님이 차가 맘에 안 드셔서 탈 때마다 기분이 상해하신다며 차를 바꿨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엄마는 아기 동자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한밤중에라도 나가서 사다 바쳤다. 아기 동자는 단 것을 아주 좋아해서 집안의 사탕이며 초콜릿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결국, 나는 아기 동자의 초콜릿 덕분에 매번 다이어트에 실패했다.
이런 이야기는 옛말이고 지금은 손님 끊긴 지 오래되었다. 남의 굿에 청송을 나가기는 하지만 요즘은 그것도 뜸하다. 어쩌다 한 명씩 찾아오는 삼만 원짜리 점 손님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사는 형편이다. 그래도 거기서 내 고등학교 등록금이 나왔으니 현관에 낯선 신발이라도 보이는 날이면 엄마보다 내가 더 긴장했다. 이제 장군님이고 할머니고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다 아는데 사주를 본답시고 횡설수설하는 엄마를 보는 일은 정말 아슬아슬했다. 답답해서 찾아오는 손님 마음 적당히 어루만져 주면 삼만 원 값어치 하는 건데 거기서 한 건 하겠다고 살풀이 운운하다 망신을 당한다.
신기 떨어진 엄마가 난데없이 내가 나이 많은 남자랑 결혼해야 액을 막을 수 있다고 했을 때는 기가 막혔다. 사기를 치려면 손님한테 쳐야지 칠 사람이 없어서 자식한테 사기를 치느냐고 코웃음을 쳤다. 더는 찾아오지 않는 귀신들을 불러들이겠다고 삼천만 원을 끌어서 굿판을 벌인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엄마의 신엄마는 삼천이나 되는 돈을 날름 집어먹고도 딴소리만 했다. 이제 신령님들이 다른 사람을 찾고 있으니 엄마는 틀렸다고 중얼거렸다. 그때 신엄마가 나를 바라보던 눈길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묘해진다. 육십이 다된 신엄마의 눈빛은 앞에 있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는 것만 같은데 정신은 명료해졌다. 나는 엄마에게도 신엄마와 눈이 마주쳤던 순간의 경험을 말하지 않았다. 삼천만 원은 한 때 엄마가 시퍼런 작두 위에서 날듯이 춤을 추던 시절 엄마 덕분에 병을 고쳤다는 몇몇 사람들이 빌려준 돈과 사채로 끌어들인 돈이었다. 굿을 해도 귀신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사채 고리는 날마다 늘어나서 엄마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내가 들어오셨다. 천금 같은 내 손주야, 만금 같은 내 손주야. 삼대 조 할머니 할아버지 양외조상이시다. 업질정 보망이 되소서. 이방불휘 타방불휘 내 고향 남을 주고 남의 고향에 와서 어찌 살았니. 불쌍한 내 손주야. 설우시다. 슬프시다. 아무쪼록 내오는 길에 복을 주시고 가는 길에 명을 주시마. 나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다."
굿판에서 공수하던 것 마냥 중얼거리던 엄마는 갑작스럽게 곡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 장군님을 원망하고 할머니를 원망하는 엄마의 곡소리는 너무 슬퍼서 나도 모르게 동요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 데려가시려거든 저를 데려가셔야지 이게 무슨 소리냐며 엄마는 신당 바닥을 구르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보다 못한 내가 도대체 나 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물어봤을 때야 엄마는 울음을 그쳤다. 급살을 맞지 않으려면 이 수밖에 없다며 엄마는 마치 준비했던 것처럼 낯설지 않은 남자의 사진을 꺼내놓았다.
아기 동자 혼령이 씌울 때면 엄마는 어리광 섞인 아기 목소리를 내며 칭얼거렸다. 그럴 때마다 은성 식당 아줌마는 과일이나 과자를 사서 아기 동자 비위를 맞추며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 아줌마는 옛정 때문인지 엄마가 전 같지 않음에도 가끔 들려 쌀도 사주고, 몇 만 원씩 놓고 절도하곤 했다. 가끔 남동생을 데리고 왔는데 누나가 절을 하는 사이 마당 귀퉁이에 엉거주춤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파리하고 해쓱한 얼굴에 금테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첫눈에 소심하다는 단어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내가 교복차림으로 쪽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마치 나하고 눈이 마주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외면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등 뒤에 들러붙은 찐득한 그의 시선을 말이다. 가슴의 봉곳한 선이 옷자락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낯선 남자들의 시선 속에 섞인 욕망에 익숙해졌다. 만원 버스 뒤에서 은근슬쩍 허리를 넘어오는 손이나 치마를 입은 채 학교 담장을 넘다 걸렸을 때, 느리고 끈적이게 훑어보던 선생님의 눈길 따위는 이미 애교스런 수준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교복 아래로 드러난 종아리를 흘끔거리던 남자의 시선은 그리 쉽게 잊히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은성 아줌마와 함께 남자가 들른 날이면 나는 옷을 갈아입기 전이나 화장실에 들어가서 자꾸만 주위를 둘러봤다. 그가 자리에 없어도 시선은 남아서 내 곁에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사진 속의 남자는 그였다. 그와의 인연이 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은 적중했다.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직 얼굴에 물기도 마르지 않은 엄마가 기대감에 잔뜩 부푼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다.
"엄마, 지금 나보고 저 아저씨한테 시집가라는 거야?"
"그럼 어쩌니, 나이 많은 남자한테 액땜하지 않으면 니가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하고 급살을 맞는다고 할머니가 그러시는 걸."
"아니 들어오라고 그렇게 통사정을 해도 못 본 체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나보고 시집을 가라니 지금 엄마 말이 곧이들릴 말이라고 생각해?"
엄마는 다시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옆에 있던 휴지를 집어 들어 코를 세게 풀었다. 유난히 흰 얼굴에 코를 풀어대자 빨갛게 변한 콧등이 도드라져 보였다.
"이년아, 그 할머니가 누구시냐? 네 삼대 조 할머니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살려야지. 그 할머니가 너 급살 맞는 꼴은 못 보실 거 아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백화점 유아복 매장에 근무했다. 명품 매장은 비정규 판매직도 대졸자를 쓴다. 같은 백화점 안에서도 몇 층 어떤 코너에 근무하는가에 따라 신분이 달라진다. 나처럼 전문계열 고등학교를 나온 신입은 식품 매장 아르바이트 아주머니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내가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받느라 하루 열 시간씩 꼬마들 비위를 맞추고 있을 때 내 또래 아이들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든 채 쇼핑을 즐겼다. 그나마 월급은 엄마가 진 빚의 뒤치다꺼리에 모두 들어가다시피 했다. 암울하기만 한 현실과 지긋지긋한 당집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렇지만, 남자의 첫인상은 두 번을 생각하기 싫도록 꺼림칙했다.
"엄마, 정말 미쳤구나. 이 아저씨 변태야! 변태! 스무 살이나 어린애를 올 때마다 훔쳐보더니 이제 아주 내놓고 작업을 하네."
"이년아,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이 우리 집에 몇 번이나 왔다고 야단이야. 거기다 보긴 뭘 푸짐하게 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그 사람한테 가지 않으면 급살을 맞는다니까."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시집을 가려면 엄마나 가. 그 아저씨 엄마하고 딱 맞는 나이네."
처음에는 엄마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년에 팔자는 얼마나 더럽기에 딸마저 앞세우게 생긴 건지 모르겠다며 우는 엄마를 계속 무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남자 이름으로 사 층짜리 건물이 있다는 말 또한 흘려버리기가 어려웠다. 결국, 나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커피숍에서 남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나를 처음 만나던 그날처럼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어린 내 맘에도 그가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는 욕망이 내면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아저씨, 도대체 우리 엄마한테 나 얼마에 팔라고 했어요?"
"무슨 말인지?"
"뭘 시치미에요. 다 아는데. 우리 엄마한테 얼마 준다고 했냐고요?"
"그런 건 아닌데. 누나가 먼저 윤서 씨에 대해서 묻기에 본 적은 있다고 했지만 나도 지금 이 자리 몹시 당황스럽거든요."
그는 너무 긴장해서 커피에 설탕을 다섯 스푼이나 넣었다. 커피를 입에 대고 얼굴을 찡그리는 그의 모습을 보다 실없는 웃음이 툭 터져나왔다.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애 앞에서 벌벌 떠는 남자의 모습은 어느 순간 긴장이 풀리게 했다. 만약 또래 남자였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소개팅이라도 좀 더 잘 보이고 싶어 했을 거다. 하지만 엄마뻘 되는 남자 앞에서는 내숭을 떨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난 제멋대로 굴었고 남자는 허둥댔다. 그럼에도 그가 진심으로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밥 대신 맥주를 마시고 비틀거렸다. 얼마나 마셨는지 정확히 기억나지지 않았다. 아차, 하는 순간에 균형을 잃고 그의 앞자락으로 넘어졌다. 코끝으로 낯선 냄새가 스며들었다. 엄마 방에 들락거리는 아저씨는 많았지만 한 번도 정식으로 아빠를 가져보지 못했다. 아빠 냄새는 이런 게 아닐까. 아직 경계심도 풀리지 않은 남자의 품에서 울컥 그리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나는 결국 남성용 화장품 냄새 속에 섞인 담배냄새 때문에 그가 조심스럽게 내민 손을 거부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의 항의 때문에 당집은 매번 허름한 변두리로 돌아야 했다. 삼 년 전에 이사한 이 집은 개발 제한 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핑계로 주인이 화장실조차 고쳐주지 않고 있다. 대문 옆에 붙어 있는 재래식 화장실은 아무리 관리해도 여름이면 구더기가 들끓는다. 엄마가 은성 아주머니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모양인데 아귀가 맞지 않는 문틈 사이로 다 들렸다.
"걔가 원조교제 하다 여자애 오빠한테 걸려서 천만 원이나 주고 합의를 봤잖아. 정말 무슨 귀신이 쓰여서 하라는 결혼은 하지 않고 어린애들만 자꾸 찾는지 알 수가 없어. 세상에 둘도 없이 얌전하고 멀쩡한 사람이 어쩌다 저리 못된 곳에 눈을 뜬 건지. 내가 속상해서 살 수가 없다니까. 저러다 패가망신하기 순식간이지.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열아홉에 죽은 그 집 삼촌 때문이야. 삼촌이 열아홉이니 그보다 나이 많은 여자들은 보이질 않는 거야. 우리 윤서가 스무 살이긴 해도 삼촌이 마음에 든대. 내가 우리 윤서 보내서 삼촌 마음 잘 달래 보낼 수 있게 해준다니까. 윤서년 팔자도 그렇게 풀어야 한다는 걸 어쩌겠어. 그나저나 삼촌한테 한 상 차려줘야지!"
나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대뜸 엄마의 어깨를 밀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조용히 발을 돌려 내 방으로 몸을 숨겼다. 엄마 말이 기가 막히기는 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기도하다. 애초부터 애비 없는 무당 딸로 태어난 내 팔자라는 것이 이보다 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액땜을 하기는 해야 할 것이다. 사위스럽게 급살 운운하는 엄마의 엉터리 사설이 아니고 내가 가진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액땜이 필요하다.
처음 서점에 방문했을 때 남자는 내가 온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계산대에 놓인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는 손님에게는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나는 천천히 서점을 한 바퀴 돌아 처음 들어왔던 출입구 앞에 섰다. 유리창 밖으로 대학의 교정이 보였다. 한 번도 좌절 따위는 겪어보지 않았을 것만 얼굴들이 보였다. 갑자기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폭삭 늙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찍었다. 지나가던 남학생 하나가 능청스럽게 윙크를 날렸다. 나는 몸을 돌려 계산대에 앉아 있던 남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우리 결혼할래요?"
키보드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던 남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 뭐라고요?"
"나랑 결혼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은성 아줌마랑 우리 엄마 말대로 우리 결혼하자고요."
"가 갑자기 왜 이래요?"
"나, 아저씨 사랑하는 거 아니거든요. 당연한 사실이잖아요. 지금 내가 어떻게 아저씨를 사랑하겠어요. 하지만 우리 집도 정말 지긋지긋해. 이제 만수향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요. 도망치고 싶은데 아저씨한테 도망쳐도 돼요?"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좋다, 싫다 의사 표시를 한 것이 없었다. 엄마에게 내가 결혼하겠다고 이야기하자 모든 일은 은성 아줌마 선에서 진행되었다. 그가 내게 한 말은 딱 하나 결혼을 위해서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의 부모석에는 은성 아줌마 부부가 앉았다. 나의 부모석엔 엄마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호텔 뷔페에서 몇몇 가족들만 모인 가운데 치른 결혼식은 참석한 하객이나 결혼 당사자나 모두 어색한 모습이었다. 은성 아줌마는 예물이라고 우스꽝스런 순금 세트를 잔뜩 안겨주었다. 요즘처럼 금값 비쌀 때 최고의 예물이라고 함박웃음을 짓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이것들이 곧 엄마 차지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집으로 내 짐을 옮기던 날, 옷장 문을 연 그의 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아저씨 뭐해요?"
내가 그의 어깨너머로 옷장 안을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교복이 걸려 있었다. 내가 가방을 챙기면서 교복을 넣지 않자 그가 상기된 얼굴로 슬그머니 교복을 내밀었다. 엄마가 열아홉에 죽은 삼촌 귀신에 씌었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 말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대학원까지 나와 서점을 하는 멀쩡한 남자가 할 짓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이 학년 때였다. 부모님이 여행간 친구의 집에서 동네 친구로 알고 지내던 남자 아이들을 불러 밤새워 논 적이 있었다. 별로 익숙하지도 않은 술과 담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아이들 몇몇은 잠이 들고 몇몇은 무슨 짓을 하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거실 귀퉁이에 쪼그린 채 잠이 들었던 나는 이상한 기척에 눈을 떴다. 입고 있던 치마가 배 위로 들쳐져 있고 팬티가 반쯤은 내려와 엉덩이에 걸쳐져 있었다. 눈이 마주친 녀석은 그날 처음 본 이웃 동네 남학생이었다. 나는 멋쩍은 듯 웃는 녀석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그렇게 나가떨어졌으면 창피해서 도망가 버릴 텐데 그 녀석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시 덤벼들었다. 나 처음이거든 한 번만 해보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대며 매달리는 녀석에게 처음엔 웃기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소리질렀다. 안 해주면 강제로라도 해 볼 거라며 애걸복걸했다. 팬티를 잡아챈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알았지만 더는 실랑이하는 것도 지겨워 말리지 않았다. 나도 처음이었지만 어차피 그런 것에 미련을 둘 만큼 소중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남들처럼 이벤트라도 몇 번 받아본 놈이라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깐 했을 뿐이었다.
한 번 해보겠다고 대들 때와 달리 막상 내 몸 위로 올라와서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몰라 헤매기만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삽입해야 할 곳을 찾지 못하던 녀석의 꼴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남편은 열여덟 그 녀석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손 한 번 제대로 잡지 않고 결혼한 첫날밤, 그는 오래도록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내가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고서 그가 얼마나 더 나를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입맞춤조차 없이 파고들던 그의 섹스는 고등학생의 그것처럼 거칠고 조잡했으며 서툴렀다.
서점은 아침 아홉 시에 문을 열고 저녁 열 시에 닫는다. 남편은 담배를 주문하고 신간을 눈에 띄는 자리에 배치한 다음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외국 유학을 준비하던 그는 위독한 아버지 때문에 서점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곧 돌아가셨지만 그는 여전히 돌아가신 분의 소망대로 건물을 지키며 살고 있다. 나는 가끔 밖에서 서점의 유리창 너머로 그를 훔쳐보곤 한다.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초조한 그의 발걸음과 한숨은 내가 곁에 있을 때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제 아무도 그를 가두려하지 않는데 그는 스스로를 시멘트 건물 안에 가두고 있다. 남편은 새장 문을 열어 주어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갇힌 새다. 자기한테 날개가 있는 것조차 잊어버린 새 말이다.
내가 남편에게 대학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자 그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남학생들이 내게 치근거리거나 건물 삼 층에 있는 당구장 주인이 말을 시킬 때면 남편의 눈썹 끝이 항상 저렇게 떨렸다. 나는 그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시했다.
처음 결혼하겠다고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엄마에게 못을 박았다. 정말 내가 급살을 맞을까 봐 결혼을 시키는 거라면 앞으로 아저씨에게 한 푼이라도 받아 낼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이다. 속으로는 그런 소리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가 남들에게 어린 딸 팔아먹었다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게 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쪽 경첩이 빠져서 흔들거리는 대문을 밀고 들어가려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은성 아줌마나, 남편이나 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정말 엄마한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마루 앞에 낯선 남자 신발이 보였다. 그래도 손님은 있는 모양이다 싶어 안도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손님을 맞는 신당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러보는데 다른 방안에서 엄마의 교성이 흘러나왔다. 비스듬히 열린 문틈 안에서 허연 엄마의 엉덩이와 허리가 요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님이 있는 줄 알고 긴장했던 나는 그럼 그렇지 싶어 허탈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엄마, 나 왔어."
급하게 꿰입은 원피스는 앞섶도 여미지 못했고 뒤로 동여맨 머리카락은 반절이 빠져서 너풀거리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은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좀 전의 흥분 때문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직도 백 명을 못 채웠우?"
"지랄 마, 저도 시집가서 알 만큼 알면서 무슨 심술이야?"
엄마가 모시는 장군님은 생전에 얼마나 호색한이었는지 엄마한테 남자를 백 명은 봐야 한다고 했단다. 그 핑계로 한 번 보면 그만인 사람부터 몇 달 혹은 일 년 이상 본 사람들까지 엄마 방을 거쳐 간 남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에 하나라도 쓸 만한 인간이 있었으면 엄마가 아직 저 모양 저 꼴로 살진 않았을 것이다. 하기야 무당하고 잠이나 자는 남자 중에 쓸 만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엄마의 눈썹은 먹물로 그은 듯 짙은 검은색이다. 그 검은 눈썹 아래로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서늘한 기운이 든다. 한 때는 저 눈빛으로 손님들을 후려서 주머니를 털더니 이제는 고작 이불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엄마, 나 우리 아저씨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빠 생각이 나. 우리 아빠는 어떤 사람이야?"
"너, 이 서방한테 자꾸 아저씨라고 할래? 누가 남편보고 아저씨래. 그리고 조만간 이 서방하고 너 불러서 굿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상은 니 시누가 차린다고 했어."
"흥, 그럼 아저씨가 아저씨지 오빤가. 누가 굿판 물어봤어. 아빠 이야기 좀 해봐."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갑자기 웬 아빠 타령이야?"
엄마가 뭉그적거리는 사이 방안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 때문에 제대로 일도 마치지 못한 남자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엄마는 피해 있으라고 눈짓을 한다.
내가 아는 아빠는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엄마를 임신시켜 놓고 책임지지 않은 무책임한 인간이라는 사실 뿐이다. 엄마는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처녀다. 그래도 엄마는 나를 버리지 않고 키웠다. 신당에 들어가면 벽에 붙은 칠성신이나 일월성신이 그려진 무신도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두렵다. 몸에 힘이 빠지면서 다리가 휘청거리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면 그 무신도를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지긋지긋한 당집서 가능한 먼 곳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엄마를 요 모양 요 꼴로 살게 했는지 말 좀 해줘 봐."
엄마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앞섶을 여미고 머리를 가다듬으며 딴전을 피웠다. 그렇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한 번 더 채근을 했다. 핑곗거리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엄마 얼굴에 체념의 기운이 스쳤다. 담배를 찾아 무는 엄마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나도 한 대 줘봐."
"지랄 마, 이년아. 누가 엄마하고 맞담배질해. 느이 아빠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너무 착해서 그게 탈이었지. 얼굴에 면서기라고 쓰여 있는 샌님이었어. 아버지가 노름꾼이었는데 월급날이면 아버지 노름빚 받으러 온 사람들이 면사무소 앞에 줄을 섰었지. 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들에 정신 못 차리고 징징대며 장남한테만 의지하는 엄마는 또 어떻고. 진짜 불쌍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내뿜는 담배연기는 축축해진 실내 공기를 가르고 내 코밑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엄마 눈치도 보지 않고 담뱃갑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그 남자 거기다 놔두면 딱 말라죽겠더라고. 땅이 다 썩었는데 나무가 어떻게 살겠어. 그런데 이 남자 나무 같은 사람이라 자기 힘으로는 그 땅을 못 벗어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어떻게든 옮기려고 하니까 끝내 따라나서지 못하데. 뱃속에 든 너를 담보로 끌어내 보려고 애를 쓰다 내가 포기했다. 자기가 그렇게 떠나 버리면 노름꾼 아버지에 철없는 엄마와 어린 동생들이 어떻게 되겠냐고 울더라."
"참, 그게 착한 거냐? 한심한 거지. 그리고 자기 가족만 우선이고 아이를 가진 엄마는 아무것도 아니야? 핑계도 참.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어?"
"죽었다더라. 결혼도 못하고 폐암 걸려 가슴이 다 썩어 문드러져 죽었다더라."
엄마가 입을 다물고 산 탓에 나는 어린 시절 잠자리에서 내 출생에 비밀을 상상하며 잠들곤 했다. 그런데 고작 가족들한테 매여서 꼼짝하지 못한 무능한 말단 공무원이라니 궁금해할 건더기도 없는 아빠였다. 그럼에도 화가 났다. 아무리 한심한 사람이라도 자식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죽어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엄마는 이미 껍질 속으로 깊숙이 몸을 숨긴 달팽이처럼 자기 생각에 빠져서 내가 옆에 있는 것조차 잊어버린 눈치다.
남편에게는 일부러 엄마에게 들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먼저 손 내밀지 않는다고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남편한테 비위가 상해 엄마 이야기는 잘 꺼내지 않았다. 괜한 소리를 물어보는 바람에 엄마는 신당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신당 문 손잡이를 잡았다 놓고는 그냥 돌아 나왔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건물 입구로 들어서는 나를 발견한 남편이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오늘 어디 갔었니?"
"왜?"
"전화를 다섯 통이나 했는데 왜 안 받아? 학원 끝나고 세 시간이나 어딜 돌아다녔어?"
의처증 걸린 늙은 남편처럼 다짜고짜 들이대는 그의 질문에 나는 심보가 뒤틀렸다.
"내가 꼭 그런 거까지 아저씨한테 보고해야 해?"
"흥, 어린놈들하고 어울려 다니려니 재미가 좋은 모양이구나."
"뭐? 어린놈들? 자기가 더 유치한 주제에. 내가 모를 줄 알아. 저녁마다 내 핸드폰 들여다보며 확인하고 있으면서. 아마 인터넷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다 알아보고 있을걸. 솔직히 말해봐 위치추적은 안 해?"
내가 생각보다 거세게 나오자 남편은 처음의 태도에 비해 훨씬 누그러져 다소 비굴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윤서야, 나는 잠시라도 네가 어디 있는지 확인이 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그럼 금방이라도 네가 떠나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단 말야. 나는 여기서 꼼짝도 할 수 없는데 너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스무 살이잖아."
나는 그에게 아빠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나무가 되어버린 아빠의 이야기를 말이다. 하지만 그건 잠시 스친 생각일 뿐이다.
"거기에 왜 나이가 나와? 공연히 나이 핑계 대지 마. 아저씨는 그저 두려울 뿐이잖아. 이 시멘트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도 두렵고, 진짜 관계를 맺는 것도 두려울 뿐이야. 다치는 게 겁나니까 돈으로 살 수 있는 어린애들에게 집착하지. 어린애들 상대하다 보면 언제까지나 안전할 것 같지. 어림없는 소리야! 아저씨도 우리 아빠도 다 멍청해."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결국 그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부분을 들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 부부가 되려면 거쳐야 할 문 앞에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망설여졌다. 나는 그와 감정의 속살을 모두 드러낼 준비가 된 것일까. 내가 문턱 앞에서 고민하는 사이 그가 돌아서 버렸다. 그는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
어렴풋하게 들리던 방울소리가 점점 커졌다. 방울소리가 커짐에 따라 제금소리까지 가세해서 고막이 터질 듯 울려댔다. 어디서 들리는지 알아보려 했으나 몸이 굳어서 발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옆에서 자고 있던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애를 썼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산더미 같은 쇳덩이가 가슴을 짓눌렀다. 숨을 헐떡거리다 이제는 죽는구나 싶은 순간 눈을 떴다. 며칠째 같은 꿈이다. 등이 흠뻑 젖어 자다 말고 옷을 갈아입는 날이 반복되고 있다.
오늘은 엄마가 열아홉에 죽었다는 시삼촌의 지노귀굿을 하기로 한 날이다. 큰 시누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는 남편은 기꺼이 굿판에 나가 절을 할 것이다. 나는 요즘 계속되고 있는 꿈 때문에 기력이 쇠잔해져서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굿을 해야 엄마 살림에 보탬이 될 듯싶어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도 하기 전에 시작된 굿은 엄마의 신엄마가 주관하고 있었다. 다섯 개의 접시로 켜켜이 쌓아 올린 과일들이 상다리가 부러질 듯 차려져 있다. 오랜만에 벌어진 굿판이어서 그런지 떡도 눈이 휘둥그레지게 차려놓았다. 계면떡, 팥떡, 방망이떡, 절편, 백설기, 인절미, 편떡, 건달떡, 웃기, 약식까지 엄마가 이번 상에 들인 정성은 아무래도 도가 지나쳐 큰 시누의 눈치가 살펴졌다. 시누는 연방 손을 비비며 왔다갔다 거린다.
"수이라 깊다 해도 베개 넘어가 수이로다. 월직사제는 앞을 서고 일직사제는 뒤를 서고 문신은 문을 열고 신신은 신을 신겨 길신은 길을 신겨 산신은 산을 신겨 여사제 대사제 아미타불 염불 고개 넘어서서 극락세계 연화대로 선하재천 하옵소사. 이씨 가중에 일가는 친척이며 동기는 일신 조카 방성들 손주 방성들 일가는 가속을 따라가는 사제짐 젖혀가고 상문짐 젖혀가고 꿈자리 몽사를 젖혀가고 석 달 삼 년이 곱게 나기를 발원이요."
청 좋기로 소문난 신엄마가 구슬프게 풀어가는 아린말명 타령소리에 시누는 눈물을 찍어내 가며 남편을 찾고 있다. 남편과 내가 엄마 손에 이끌려 무릎을 꿇자 신엄마 타령은 한층 더 힘을 받기 시작했다.
"오늘은 사람이 죽어 구원되면 칠칠이 사십구제 백일제 불전 장전 받아먹게 마련하고 또 무장승은 시왕 군웅치 받아먹게 마련하고 또 그애기 기르던 바리 공덕 할미 할애비 벌배 나점배 양귀비 조밥 받아먹기 마련하고 성후망 두 망제님 후세 발원 남자 천도 부처님 인도하시는 데로 가시는 날이로성이다."
벌써 얼마나 뛰었는지 신엄마의 버선바닥이 새까맣다. 버선이 하늘을 향해 뛰어오를 때마다 홍철릭 자락이 휘어 감긴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남편과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무릎이 먼저 닿고 고개가 땅에 닿았다. 상체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몸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갑자기 지난밤처럼 쇳덩이가 허리 위에서 누르고 있는듯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앞을 보니 신엄마가 내려놓은 열두 방울이 저 혼자 놀고 있다. 방울은 나를 향해 흔들거리고 있는데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허리를 일으켜 세우려 애를 썼지만 이미 정신이 가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별이 총총하던 하늘이 둘로 갈라지더니 상복을 입은 상주들이 여럿 보였다. 무슨 일인가 궁금한 마음이 들 사이도 없이 상주들이 온데간데없어졌다. 곧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나를 향해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돌멩이는 가까이 다가올수록 새빨간 불덩이로 바뀌었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 불을 받아들이면 더는 삶이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은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왔다. 얼굴도 모르는 아빠는 자기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갔다. 남편 또한 오래전부터 팔리지 않는 귀퉁이의 책처럼 자기 건물에 붙들려 꼼짝 못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한쪽 발을 떼서 몸을 돌리는 순간 불덩이는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깨가 화끈거렸다.
눈을 뜨니 겁에 질린 엄마와 남편의 모습이 제일 먼저 보였다. 응급실의 요란스런 발걸음 소리가 차츰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쪽 어깨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굿판을 위해 쳐놓은 천막 기둥이 넘어지면서 내 어깨를 덮쳤다고 한다. 천막과 기둥을 연결하는 송곳 부분이 어깨에 상처를 내긴 했지만 그리 심한 것은 아니라며 천만다행이라고들 수런거렸다.
"거봐라. 윤서야, 할머니 말씀이 맞잖아. 이렇게 액땜하고 넘어가게 된 건 다 할머니 말씀 따른 덕분이야. 아이고, 지장보살님, 일월 선신님, 칠성님, 용할머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엄마가 손을 비비며 읊어대는 소란스런 사설을 들으며 나는 다시 깊은 잠속에 빠져들었다.
나는 이제 스물한 살이다. 요즘 유행하는 하이웨스트미니스커트에 킬힐을 신어도 어색하지 않은 것이 제법 성숙해졌다. 우리 서점이 이웃해 있는 유명 대학에는 입학하지 못했지만 수도권에 있는 전문대에 다니고 있다. 수업 끝나면 조별 과제물 때문에 절절매는 것이 여느 대학생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친구들은 저녁에 늦어지는 일이 있으면 부모님께 전화하고 나는 남편에게 전화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끔 쨍하게 울리는 제금 소리와 함께 친구들의 사고소식 따위가 환청처럼 먼저 들려 곤란을 겪지만 나는 모르는 척 입을 다물어 버린다. 어깨에 남겨진 흉터가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지는 것처럼 언젠가는 사라질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지노귀굿으로 열아홉 살에 죽은 삼촌의 원한을 풀어 보냈다고 주장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장롱 속에 깊숙이 넣어둔 내 교복을 만지작거린다. 그는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다. 자신의 성채에서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엄마가 아빠를 데리고 나올 수 없었듯이 나 또한 그를 깨울 수 있는 공주는 아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그의 공주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나는 겨우 스물한 살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엄마는 점 손님 앞에서 매번 확신을 하고 자신 있게 굿 이야기를 꺼내다 망신을 당하곤 한다. 내 앞에 펼쳐진 날들에 기대를 하는 것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우리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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