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몇 살이야?"에 담긴 사회학
새해가 밝았다. 이 말은 '새로운 해'가 밝았다는 말이다. '찬수개화(鑽燧改火)'라는 말이 있다. 예전에는 해가 바뀌면 불씨를 다시 일으켜 불을 새로 피웠다고 한다. 해라는 빛, 불이라는 빛, 새해를 사람들은 이렇게 기대했었나보다.
그래서 지난해 12월 31일 자정에도 새해맞이 행사로 보신각 종이 어김없이 울렸다. 그리고 새로 뜨는 해를 보려고 사람들은 가능한 한 동쪽으로 다가갔다.
나도 달력을 바꾸었다. 하지만 명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 해가 바뀐 것이 아니다. 입춘(立春)이 지나야 경인년(庚寅年)이 되는 것이다. 전국이 얼어붙은 날씨에 입춘 얘기를 꺼내는 게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원래 봄은 가장 추울 때 고개를 드는 법이다. 절기(節氣)를 보라.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大寒) 다음이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칩(驚蟄)이다. 추운 겨울을 나고 계신 분들에게 힘내라고 알려드린다.
▲ 시간 구획의 역사성
2010년은 서기(西紀), 즉 서력(西曆·서쪽 나라 달력) 기준으로 셈한 캘린더다. 이를 '그레고리력'이라고 부르는데, 흔히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했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부활절 조정을 위해 만들어진 역법이다. 달력의 사용이 곧 당시 문명의 축이 어디였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대 문명의 축과 지향을 '2010'이란 숫자처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물론 과거에도 마찬가지 경우를 찾아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연호를 중심으로 연도를 헤아렸다. 예를 들어 '만력(萬曆) 20년' 하는 식으로. 만력은 중국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로,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선조(宣祖) 25년(서기 1592년)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로 국제관계나 국가차원의 사건이나 시기 표기가 필요할 때 사용했고, 통상 '금상(今上) 5년', 즉 '현재 임금님이 재위한 지 5년째' 식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것은 간지(干支)를 쓰는 것인데, 지난해가 기축년(己丑年), 올해가 경인년 하는 식이 그것이다.
어떤 분들은 중국 연호를 썼던 사례를 들어 조선 정부의 사대주의적 성격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2010년' 하는 식의 '서양 연호'를 지금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어떤 연호를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문명의 교류와 축에 관한 문제이며, 사대주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은 비약이고 콤플렉스일 뿐이다. 또 조선시대에는 중국 연호에 대한 의존도가 현재 한국사회 서양 연호에 대한 의존도보다 훨씬 적었다.
▲ 마흔 살의 희망
해가 바뀐다는 사실은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변화를 의미한다. 해가 바뀌면서 어른이 되었다며 뿌듯해하는 청소년도 있을 것이고, 내가 뭘 한 게 있나 하고 한숨을 쉬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가 바뀌면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문득 스물아홉 살의 어느 날이 떠오른다. 곧 서른이 되는구나 싶을 때의 절망감과 함께, 왜 하필 그때 마흔의 나를 같이 상상했는지. 스물아홉에 상상했던 마흔의 나이는 거의 암흑이었다. 아! 꽃 같은 젊음은 가고, 누구 하나 돌아볼 이 없는 나이….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마흔이 되던 생일날에 11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웃었다. 막상 되고 보니, 마흔이란 나이? 참으로 활기 있고 할 일 많고 아름다운 나이였다. 그때 쉰 넘어 예순이 다 된 아는 분께 그 얘기를 했더니, 그 분이 빙긋이 웃으며 왈, '예순 살도 그래.' 하셨다. 난 그 분의 말을 믿고 산다. 아마 그럴 것이다. 물론 젊음도 아름답다.
▲ '너 몇 살이야'란 말의 기원
그러나 나이에 대해 늘 좋은 기억만 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이 사회에서 살다보면 그렇다. 사람들 관계에서 나이를 따지는 경우가 그러하다. 세간에서 '민증(주민등록증) 깐다'는 속어를 만든 것 말이다. 이 역시 사람들은 유교의 장유유서(長幼有序)가 낳은 악습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하긴, 맹자(孟子)가 오륜(五倫)을 말하면서 '장유유서'를 꼽았으니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맹자는 또 "동네에서는 나이를 기준으로, 관직에서는 직급을 기준으로, 배움에는 그 사람이 쌓은 덕성을 기준으로 위·아래를 가른다"고 말했던 것으로 보아, 맹자의 본의(本意)도 나이를 최후의 보루쯤으로 여기는 요즘의 행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서로 나이를 고려한 배려가 필요한 경우는 많다. 나이가 연륜이나 경륜으로 느껴질 때는 더욱 그러하다. 어느 경우에라도, 우리들이 장유유서라는 유교 질서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른 사람과 만날 때는 상대에게 따뜻하고 공경스러워야 한다. 나이가 자기보다 곱절이 되면 아버지처럼 대하고, 10살 이상 많으면 형으로 대하며, 5살 이상 많으면 좀 더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다. 가장 해서는 안 될 짓(?)은, 많이 배웠다고 뻐기는 것이며, 기운을 믿고 남을 우습게 여기는 일이다."
(李珥, 『擊蒙要訣』, 「接人」, 凡接人當務和敬, 年長以倍, 則父事之, 十年以長, 則兄事之, 五年以長, 亦稍加敬, 最不可恃學自高, 尙氣凌人也)
학년이나 학번을 따지는 세태나, 특수성을 인정하더라도 지나친 군대의 '짬밥'에 비교할 때 율곡의 나이 범주는 무척 넉넉하다. 5살 정도를 또래 집단으로 하고, 10살 정도를 형뻘로 분류했으니, 교유 집단을 매우 폭넓고 탄력적으로 설정한 이 율곡의 발언은 그 자체로 낯설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주고받은 편지나 시(詩)를 보면 친구가 되는 나이 폭이 넓다. 한두 살 차이는 아예 따지지도 않는다. 율곡의 말처럼 적어도 다섯 살, 아니면 열 살은 되어야 말투에서 위아래를 나누는 느낌을 찾을 수 있다.
▲ 나이와 세대를 넘어
이런 현상이 생기는 하나의 이유가 교육 시스템에 있다고 생각된다. 즉, 근대 초중등 교육의 학제와는 다른 조선의 서당(書堂)과 서원(書院)의 학제가 그것이다.
조선시대 교육제도는 근대적 보편 교육이 아니다. 즉, 중앙집권국가의 정책을 이해하고 따라줄 '국민'이자 자본주의체제의 재생산에 필요한 평균의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노동자'를 양성할 의무교육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배움에 대해 사회적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개인에게 제도적으로 균일하게 교육 프로그램이 강제되지 않았다.
그 결과 입학과 진학 햇수에 따른 학년별 또래 및 교유집단이 아니라 느슨한 동무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입학년도부터 제각각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서당에는 발발 갓 걸음을 뗀 아이로부터 떠꺼머리 총각까지 한 데서 배웠다. 게다가 천자문(千字文)이든, 소학(小學)이든 몇 년씩 걸리기도 했기 때문에 커리큘럼의 압박도 적게 받았다. 율곡이 한 말은 바로 그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에게는 세 군데 공부모임이 있다. 한 모임에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쉰여덟이 되신 어른까지 있고, 또 한 모임에는 고3에서 나까지, 또 한 모임에는 대학원생부터 역시 예순이 다 된 어른까지 참석하고 있다. 새해가 되어 나이에 생각이 미치자, 새삼 이들 나의 동학(同學), 동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이렇게 적어둔다.
/오항녕(문화전문객원기자·한국고전문화연구원·수유너머 구로)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