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기생가수로 인기가 높았던 김복희는 음반을 녹음하러 평양에서 서울로 갈 때 팬이 마련해 준 비행기를 타고 다녔다. 이 일로 '비행기 원정'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장유정 단국대 교양학부 교수는 '역사비평' 2010년 봄호(통권 90호)에 기고한 「이 땅에서 '별'로 산다는 것은-대중가수의 탄생에서 귀환까지」라는 글에서 김복희의 사례를 들며 식민지시대 대중가수의 인기가 지금처럼 대단했다고 설명한다.
장 교수는 당시 가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표적 사례로 1935년 잡지 '삼천리'가 주최한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를 들었다.
1935년 1월부터 9월까지 집계한 최종 표수는 1만130표에 달했다. 하얼빈에서부터 상하이, 하와이, 북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투표용지가 왔다.
1위에서 5위까지를 보면 남성 가수는 채규엽, 김용환, 고복수, 강홍식, 최남용 순서였고, 여성 가수는 왕수복, 선우일선, 이난영, 전옥, 김복희 순이었다.
1930년대는 레코드 황금시대라 불릴 정도로 음반 산업이 활기를 띠며 대중가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로 좋은 가수를 영입하기 위한 음반회사들의 쟁탈전도 벌어졌다고 장 교수는 설명했다.
레코드사 오케의 직원들은 태평과 전속계약을 하기로 약속한 이난영을 데려오려 변장을 하고 밤중에 태평 회사를 포위하거나 자동차 추격을 벌였으며, 황금심이 오케와 빅타에 이중계약을 하면서 오케와 빅타의 싸움이 법정까지 간 적도 있다는 것이다.
또 최근 아이돌 그룹의 팬들이 혈서 사건을 일으켜 문제가 됐는데 1930년대에도 고복수의 극성팬이 손수건에 혈서로 '애(愛)' 자를 적어 보내 고복수가 질겁을 하는 일도 있었다.
장 교수는 당시의 가수들은 월급을 받으면서 음반을 취입할 때마다 수당을 받았는데 가수들의 취입료는 갑ㆍ을ㆍ병ㆍ정의 등급으로 다르게 책정됐으며 갑과 정의 차이가 5배나 됐다고 말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왕수복은 못 벌 때 한 달에 300~400원을, 많이 벌 때는 700~800원을 벌었는데 간호사나 교사의 급여가 50원 내외였다는 점을 볼 때 가수의 수입이 상당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태평양전쟁이 본격화한 1940년대를 맞아 가수들은 침략전쟁에 부응하는 군국가요 음반에 참여해야 했다.
장 교수는 "그들의 과오를 명확히 밝히되, 그들의 공적마저 외면하는 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식민지 시대의 삶을 다루는 특집을 마련한 '역사비평' 봄호는 식민지시대 대중가수의 삶을 다룬 이 글 외에도 학생, 지식인, 노동자, 지방유지 등 다양한 계층의 생생한 삶을 보여주는 글을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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