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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의 인문학 에세이] 봄눈(春雪)속에 감상하는 세한도(歲寒圖)

나중에 시든다?…반박 그리고 그 끝…추사의 일획, 나의 일획…거친 황량함에서 발견하는 정감

사람들은 때 아닌 눈이라고 하지만 때 아닌 자연현상은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건 다만 자연을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우리의 인식때문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때 아닌 자연 현상 속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특히 이번에 전국에 내린 봄눈은 그렇다. 신문에는 곧잘 '때 아닌 눈'이라고 표현하지만, 원래 봄눈은 봄이 오는 길목의 단골손님이었다. 다만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분들이 또 피해를 본 데가 많은 듯해서 마음이 편치 않다.

 

▲ 나중에 시든다?

 

예전에 서당에서 한문을 배울 때의 일이다. 공자(孔子)의 대화와 일상을 기록한 「논어(論語)」 9편이 「자한(子罕)」편인데, 거기에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彫也."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걸 나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든다'라고 풀었다. 여기서 '나중에 시든다(後彫)'는 말이 문제였다.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해석한 나에게 함께 공부하던 친구는 틀렸다고 지적한다. 소나무나 잣나무는 상록수이기 때문에 시들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므로 '시들지 않는다'로 해석해야 옳다고 했다.

 

얼핏 들으니 그럴 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수긍이 가질 않았다. '後彫이 彫자는 凋자와 통한다'에는 '(시들지) 않는다'는 글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친구는 다시 '후조'란 '시들기를 뒤로 한다'고 해석해야 하며, 이는 곧 '시들기를 거부한다', '시들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대목은 공자가 시류에 따라 변절하는 삶을 비판하면서 시세에 굴하지 않는 곧은 절개를 소나무에 비유한 말인데, 내 말대로라면 일단 지금은 변절하지(시들지) 않다가 나중에 변절한다는(시든다는) 의미로 공자가 말했다는 거냐고 반문했다. 앞뒤 정연한 친구의 말에 나는 알겠다고 하고 물러서야 했지만, 그 뒤로도 완전히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 반박, 그리고 그 끝

 

 

그러던 중 어느 날 나는 친구에게 반박할 단서를 찾았다. 소나무도 시든다는 사실이었다. 소나무가 감나무처럼 1년에 한 번씩 잎이 나고 가을에 떨어지지는 않지만, 대체로 2년 이상 지나면 떨어진다(시든다)는 것이었다. 떨어질 때는 계절에 상관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친구가 말한 '시들기를 거부한다', '시들지 않는다'란 해석은 소나무나 잣나무의 실제 생리와 맞지 않는 해석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다시 대들었다. 산동 지역(공자가 살던 노(魯)나라가 중국 산동반도 근처였다)에 살던 공자가 소나무나 잣나무도 매년은 아니지만 해가 쌓이면 시들어 떨어진다는 사실을 몰랐겠느냐, 분명히 알았을 것이고, 따라서 공자가 말했던 '後彫'는 '나중에 시든다'는 의미이다, 라고 반론을 폈다. 당연히 친구는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친구든 나든 같은 문제에 부딪혀야 했다. 바로 '나중에 시든다'고 해석하면, 절개가 곧았던 사람도 나중에는 변절한다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게 청년 시절에는 아포리아(難題)로 가슴 한 켠에 담아둔 해답은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풀렸다. '나중에 시든다'로 해석하든, '시들지 않는다'로 해석하든, 누구도 공자의 본의를 '그때는 변절하지 않다가 나중에 변절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 그랬을까? 그렇다. 비유였기 때문이다. 모든 비유에는 본의가 있고, 그 본의를 담는 여지가 있다. 사람들은 그 비유에서 본의를 찾아낼 줄 알았던 거다. 나와 내 친구는 본의와 여지를 혼동했던 것이고. 답은? 둘 다 맞는 해석이다.

 

▲ 추사의 일획, 나의 일획

 

참으로 오랜 동안 공자의 이 말은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들었다. 그러던 중 조선의 어느 학인은 공자의 말을 그림으로 형상화했다. 그 사람은 추사 김정희(1786~1856)였고, 그림은 바로 '세한도(歲寒圖)'였다. 조선 문화의 전통을 온축한 상태에서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를 온전히 받아들여 소화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킨 19세기의 학인.

 

그러나 '세한도'를 보았을 때 나는 '저게 뭐야?' 하는 수준의 미감(美感)만을 가지고 있었다. 덩그러니 집 한 채, 그것도 뭔가 각도도 안 맞고 휙 그린 듯한 거친 붓질. 소나무는 왜 이리 못 생겼나 … . 이렇게 '세한도'는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러다가 간송미술관에서 열리는 봄, 가을 전시를 따라다니다가 몇 번 추사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종전과 마찬가지로, '저런 글씨는 초등학생도 쓰겠다…'며 예의 무식을 드러내기 일쑤였다. 물론 그런 무식을 오래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추사는 같은 획을 만 번, 천만 번이라도 그려내지만, 초등학생이든 나든 한 번도 그려내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무렵 좋아하게 된 추사의 글과 글씨가, "봄 바람 같은 큰 아량은 만물을 품에 안고, 가을 물 같은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는 대련(對聯)이었다.

 

▲ 거친 황량함에서 발견하는 정감

 

나중에 알고 보니, '세한도'를 보면서 '이게 뭐야!' 하는 반응을 보이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슨 그림이 이렇게 생겼냐는 표정으로 당황한단다. 대충 그린 나무 몇 그루, 이상하게 생긴 집, 사람도 배경도 없고, 화려한 채색도 뛰어난 묘사도 없고 … . 바로 내 느낌 그대로이다. 황량함!

 

이 그림은 추사가 제주도 유배 생활 중에 그린 그림이다. 그러니 황량할 수밖에! 세도정치의 와중에서 추사 집안은 왕실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김노경은 관직까지 추탈당하는 변고 끝에 추사는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나야 했다.

 

그래도 차과복통(車過腹痛·무덤을 그냥 지나치면 서운해서 서너 걸음도 가지 않아 배가 아프게 될 정도로 친한 친구를 말함)의 두 친구, 황산 김유근과 이재 권돈인이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곧 김유근이 병으로 세상을 뜨고, 권돈인만 남게 되었다. 김유근은 안동 김씨, 추사는 경주 김씨로, 세도정치의 경쟁 가문이었음에도 더할 나위 없는 벗이었다. 초의(艸衣) 같은 스님이나 몇몇 지식인들도 험한 바닷길을 헤치고 추사를 찾았다.

 

우선 이상적(李尙迪)은 이러한 추사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했던 사람이었다. 역관(譯官)이었던 이상적은 북경(北京)의 소식은 물론 최신 서적을 구해 와서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아마 이런 즐거움이 없었다면, 추사는 그 세월을 쉽게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로 '세한도'는 추사가 이상적에게 준 마음의 선물이었다. 한겨울이 되면 소나무나 잣나무가 푸르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이상적은 변치 않는 의리로 추사 곁에 있어 주었다. 어찌 그 마음의 표현 하나가 없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이 그림에는 이상적에게 보내는 '세한도서(歲寒圖序)'가 붙어 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태사공(太史公. 司馬遷)은 '권세나 이권 때문에 어울리게 된 사람들은 권세나 이권이 떨어지면 만나지 않게 된다'고 했다. 그대 역시 세상의 이런 풍조 속의 한 사람인데 초연히 권세나 이권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나를 대했단 말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오항녕(문화전문객원기자·한국고전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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