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전북은 동학혁명 발상지로써도 유명하지만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된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이후 전북에서 전개된 의병활동도 새롭게 조명(照明)을 받어야 한다.
어제 24일은 을사늑약이 맺어진것에 분격한 경기도 ,포천 출신 면암(勉庵) 최익현이 의병을 모아 일본에 대항코자 경기도 포천을 탈출하여 전북 태인(泰仁)에 도착한 때가 1906년 3월 24일이었다. 태인은 지금은 정읍시 태인면이며 최익현이 도착한 날자가 어제 3월 24일이었던 것이다. 정읍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여기에 참가했던 민중들의 일부가 다시 나라를 다시 찾고자하는 의병운동에 가담했다고도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강원도 원주에서는 원용팔(元容八)부대가 제일 먼저 군사를 일으켰고,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민종식(閔宗植)이 군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최익현의 의병운동도 이 의병 운동과 연장선상에 있다. 최익현이 1906년 3월 24일 태인에 도착한 며칠후에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 모집을 위한 궐기가 있었는데 80여명이 호응을 해왔고 무기도 준비하기도 했다.
대오를 갖추고 태인읍으로 처들어 가자 태인군수 손병호(孫秉浩)는 소문을 미리 듣고 도망을 쳐 ,쉽게 태인을 접수하게 되었다. 그후 다시 가까운 정읍으로 진군하니 정읍군수 송종면(宋鍾冕)이 의병을 맞이하였다. 정읍에서 의병 100여명을 모집하여 이 의병을 거느리고 내장사에 머무르니 뜻있는 포수(砲手)들도 호응하여 의병이 자그만치 30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구암사라는 절을 거쳐 순창으로 진군했다. 전남 곡성(谷城)까지 진출은 했으나 여의치 않아 남원(南原)으로 회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병은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후 일본의 지원을 받은 관군(官軍)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최익현, 그의 제자 임병찬은 포로가 되어 서울에 압송되었다.
서울의 일본 사령부에 갇혀 최익현은 감금 3년, 임병찬은 감금 2년의 형(刑)을 받고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었다.최익현은 대마도 유배지에서 74세의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단식투쟁을 하다가 1개월만에 세상을 뜨게 된다.이처럼 전북은 농도(農道)였으면서 충절의 고장이었다.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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