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상회 날로 번창 62년 삼남메리야스공업사 출범…63년 '쌍념섬유' 상호 변경 64년 '쌍방울' 상표 첫 출시
▲ 형제상회 호남지역 최대 도매상
형제상회는 개업 1년만인 1955년에 10평에서 30평 규모로 커졌다. 취급 물량이 많아지면서 잡화상으로 커졌다. 생활의류 절대량이 부족하던 때여서 물건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양말도매상에서 내의류 도매상으로 성장한 형제상회는 종업원이 18명에 달했고, 1958년 무렵 대전 이남의 충청권과 호남지역 최대의 메리야스 도매상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규모가 커지면서 형제상회는 소규모 메리야스 제조업체에 자본을 대주고 생산품을 납품받기도 했다. 하지만 형제상회의 판매량이 워낙 많아 전체 물량의 절반 정도는 대형 메리야스 업체에서 공급받아야 했다. 하지만 대형 메리야스업체는 형제상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대량으로 물량을 쏟아내며 도매상에게 떠맡기기도 해 곤욕을 치러야 했다. 판매 물량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 애를 태우기도 했다.
이봉녕은 결국 마음에 드는 제품을 직접 생산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히고, 사업 구상에 들어간다.
그러나 1958년 메리야스업계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쳐 1107개이던 업체가 726개로 감소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봉녕은 품질이 떨어져 소비자에게 외면받는 기업, 자금력이 취약한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 창업 시기를 놓고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1962년 9월 동이리역 부근인 이리시 인화동 2가 57번지에 대지 280평, 건평 200평 규모의 공장을 마련하고, 삼남메리야스공업사를 출범시켰다. 중고 편직기 7개, 재단기로 작두 4대와 핸드나이프 1대, 염색시설을 갖췄다. 종업원은 50명이었고, 동생 창녕이 공장장을 맡았다.
그러나 메리야스 장사를 하면서 품질은 물론 소비자들의 성향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이봉녕에게 초기 제품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기술자들과 다툼도 잦았다. 그렇게 탄생한 첫 제품이 '삼남표'라는 상표를 부착하고 시장에 나왔다. 하지만 1년이 지나서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삼남메리야스는 자금압박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 이봉령 사장 불량품 모두 불태워
창업 후 지난 1년을 결산했지만, 기업의 미래가 밝지 않았다.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조직적이고 일관성 있는 운영체제가 절실했다. 이봉녕 사장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 먼저 1963년 3월1일 상호를 쌍녕섬유공업사로 변경했다. 형제를 의미하는 쌍(雙)자와 봉녕(奉寧), 창녕(昌寧)의 이름 끝자인 녕(寧)을 조합한 것으로, 외형적으로는 단순히 상호만 변경한 조치였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창업주 이봉녕 사장이 비로소 사업가로서의 뚜렷한 미래와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출발선에 섰음을 의미했다. 훗날 쌍방울이 1963년 3월1일을 그룹의 실질적인 출발 기점으로 잡은 것도 이런 연유였다.
당시 메리야스업계는 1962년 6월 단행된 화폐개혁으로 초래된 자금난과 구매력 감소 등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원료난으로 조업을 단축하고, 휴업하는 공장도 많았다. 쌍녕도 마찬가지였다.
이봉녕 사장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품질개선과 원가절감을 통한 경쟁력 확보라고 믿었다. 그는 면 제품에 대한 혜안을 갖고 있었고, 자사 제품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다. 불량품은 종업원들이 보는 앞에서 가차없이 불질러버렸다. 이에 주변에서 불평의 소리가 나오자 이봉녕은 "소비자를 속이고 불량품을 생산공급하는 기업은 사기꾼과 다를 바 없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 쌍녕은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시장에서 품질 우수성을 인정받았고, 경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 계획이 성공하면서 국가 경제가 성장, 섬유산업도 성장 국면에 들어갔다.
쌍녕도 제품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판매가 호조세였지만 전국 판매망은 어림없는 상황이었다. 충청·전라도를 뛰어넘어 서울과 부산, 대구 등 전국 시장으로 진출이 절실했다.
▲ 쌍방울의 등장
이봉녕 사장은 '삼남표'라는 상표가 전국 소비자들의 의식 속에 파고들기 어렵다고 판단, 상표 변경을 모색한다. 그래서 나온 상표가 '쌍방울'이다. 쌍방울은 사람들이 항상 몸에 밀착하고 애용해야 할 속옷류에 대한 명칭으로서는 정감을 느끼게 했고, 또 상호인 쌍녕의 한글식 표기여서 거부감도 없었다.
쌍녕섬유공업사는 1964년 10월부터 새로운 상표 '쌍방울'을 출시했다. 다만 충청과 호남지역 출하제품에 한해서는 삼남표를 당분간 사용키로 했다.
쌍녕섬유공업사가 쌍방울 상표를 앞세워 전국 시장에 진출하던 1965년 무렵, 국내 메리야스업체는 500여개에 달했다. 서울과 부산·대구, 그리고 전북지역에 대부분 업체가 밀집했다. 주요 상표는 서울의 독립문표·무궁화표·태복, 부산의 왕자표·캉가루표·기차표·매표, 대구의 지구표·청포도메리야스, 광주의 남영·백마표, 전북의 백양·태창메리야스·금성섬유·해신·대성메리야스 등이 대표적이었다.
따라서 쌍녕이 전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 유수의 상표 벽을 허물어뜨려야 했다.
이봉녕 사장이 꺼낸 첫 카드는 서울판매부 설치였다. 서울판매부의 성공은 쌍녕섬유가 전국적 유통망을 구축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1965년 서울판매부 설치 후 쌍방울표가 서울 대표 브랜드 독립문표와 무궁화표의 벽을 뚫고 서울에 안착하는데는 1년 이상 걸렸다. 이어 부산에 판매 거점을 마련한 쌍녕은 전국적으로 판매망을 확대해 나갔다. 1960년대 중·후반들어 쌍방울이 전국적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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