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후반 동종업계 최초 컴퓨터 시스템 도입…이의철 사장 취임 본사 서울로
메리야스의 품질 고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술과 시설, 그리고 면사의 질이 중요하다. 쌍녕섬유는 이봉녕 회장의 엄격한 품질관리체제 아래 창립 10년여만에 업계 선두 위치에 올라섰지만, 고민을 하나 안고 있었다. 바로 품질좋은 메리야스를 생산하기 위해 꼭 필요한'품질좋은 면사의 안정적 공급' 문제였다. 쌍녕은 메리야스 제조업체일 뿐 원재료인 면사는 풍한방직, 충남방적, 경성방직 등 전국의 방적업체로부터 공급받았다. 하지만 독과점 품목으로 지정된 면사는 가격 인상이 자유롭지 못했고, 방적업체들은 생산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매년 면사파동이 일었고, 1972년과 1976년에 발생한 면사파동은 메리야스 제조업체들이 생산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심했다. 이럴 때마다 면사 확보도 힘들지만, 불량률이 심해 원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했다. 면사 불량률은 곧바로 메리야스 제품 불량률을 높였다.
▲ 면사-내의 첫 일관 생산체제 갖춰
이봉녕 회장은 이 문제의 근본적 해법은 방적공장을 직접 설립해 운영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1976년 10월16일 이리시 신흥동 220번지 이리공단 내의 부지 4만2567평을 매입하고, 이어 10월29일 상공부로부터 5만112추의 섬유시설 설치 허가를 받았다. 방적업체가 면사 가공업에 진출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가공업체가 시설과 자금 소모가 많은 방적업에 뛰어들기는 쌍방울이 처음이었다.
1977년 3월4일 자본금 10억원으로 출범한 쌍녕방적주식회사(대표이사 이봉녕)는 그해 5월 일본 도요멘사와 780만 달러 상당의 장기차관에 의한 자본재 도입 계약을 체결, 면방적기를 확보했다. 이어 8월5일 본공장 8000평 등 총9600평 규모의 방적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5만112추의 시설재와 건설비 등 총70억원이 투자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1978년 6월 쌍녕방적은 1차공장을 완공(10월19일 준공식), 기존 17개 방적업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면사 생산능력은 연600만㎏이었고, 이중 60%는 쌍방울이 사용했고, 나머지는 외부에 판매했다. 소규모 메리야스업체로 출발한 쌍방울이 창립 15년만에 원사에서 제품까지 일관 생산하는 국내 유일의 기업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쟁 방적업체들이 쌍방울에 면사 계약을 기피,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충남방적의 계열사(봉제공장)를 인수하는 대가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시련이 닥쳤다. 쌍방울과 별도 법인으로 출범했던 쌍녕방적은 1979년 4만176추를 증설하며 사세 확장에 나섰지만, 1979년 세계경제를 강타한 2차 석유파동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1981년 2월26일부로 쌍방울에 흡수 합병됐다. 방적공장 당시 480원 정도였던 원/달러 환율이 1981년 1월에는 700원으로 절하되고, 국제금리도 17.55%로 급등해 쌍녕의 경영을 압박, 독자생존이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 내수부진, 수출로 극복
쌍녕방적이 출범한 1977년은 우리나라가 사상 최초로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할 만큼 고도성장기였다. 쌍방울도 1979년 석유파동 직전까지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쌍방울의 매출은 1977년 120억원대였지만, 1978년에는 241억원으로 껑충 뛰어 사상 처음 200억원대를 넘어섰다. 하지만 석유파동이 터지자 내수시장은 얼어붙었다.
쌍방울은 위기에도 강했다. 1980년까지 480억원까지 급신장하던 매출액이 석유파동 후 이어진 경기침체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1981년 489억원에 그치자 쌍방울은 경영전략을 수정, 1979년 무렵부터 해외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나섰다. 이 수출전략이 맞아떨어지면서 쌍방울은 신장세를 이어갔다. 1979년 24억원에 불과했던 메리야스 수출액이 1980년 45억, 1981년 60억원을 넘어섰다. 게다가 쌍녕방적 면사 수출액이 70억원을 넘어서면서 총137억원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다. 1981년 쌍방울의 전체 수출액은 1000만 달러를 상회, 그해 12월22일 열린 제18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수출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의철 사장이 산업포장을 받았다.
내수시장에서도 쌍방울은 신제품을 계속 출시, 소비자 관심을 집중시켜 나갔다. 여성내의 '뉴인나', 편면 조직에 신축성과 광택 효과를 낸 '브라이트', 고급 '백수메리' 등은 당시 나온 대표적 신제품이었다.
▲ 1987년 try 탄생
이의철 사장은 1979년 6월 취임 후 많은 변화와 혁신을 추구해 나갔다.
그는 취임 2개월 후인 1979년 8월1일 동종업계 최초로 컴퓨터 시스템을 도입, 서울사무소와 이리 본사를 온라인으로 연결했다. 이 시스템은 HP-3000Ⅲ 기종으로 인사관리 및 자재관리는 물론 원사 투입에서 제품 공급에 이르기까지 관리의 현대화와 제품의 품질개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의철 사장은 이어 본사 서울 이전 작업을 추진, 그해 12월1일부로 이리에 있던 본점 소재지를 서울로 이전하고, 생산 관련 부서를 제외한 관리부서 전체가 서울로 이사했다.
쌍방울은 처음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녕빌딩에 입주했지만, 1988년 11월 서울 강남구 논현동 49-4번지 자체 사옥에 입주하며 토탈패션업체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이어 기업공개에 나서 1984년 9월19일에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자본금 규모는 120억원이었다.
젊은 사장 이의철은 또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용 패션내의(쟈키·JOCKEY)를 출시, 그동안 백색내의 일색이던 국내 내의시장을 뒤흔들었다. 1984년 7월 미국 쟈키사와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한 뒤 1986년 남성용, 1988년 여성용(JOCKEY FOR HER) 패션내의를 내놓았고, 이들 제품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보수적인 속옷 문화에 일대 전환점이 됐다.
고가의 고급 패션내의 자키에 맞서 1986년 백양에서 BYC, 1987년 태창에서 VICMAN 브랜드의 패션 내의가 나오면서 국내 패션내의 시장은 치열한 경쟁 체제에 돌입했다.
이 때 쌍방울은 중상가격의 패션내의류 시장에 대응할 자체 브랜드 개발을 고민했고, 1987년 11월 try가 탄생했다. 중가품인 쌍방울과 고가품인 JOCKEY 사이의 중상가 패션내의 try는 출시 초기 고유 브랜드 이미지가 부족해 고전했지만, 제품을 다양화(1990년 190개 품목)하고 광고에 주력하며 소비자 관심을 유발시키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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