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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38)고구려의 상징 광개토호태왕비③

中 서풍과 전혀 다른 우리민족 고유서체

酒勾景信의 쌍구가묵본(1면) ([email protected])

지금까지 살펴본 광개토호태왕비에 관한 내용은 오히려 국부적인 문제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비문의 일부 내용에 천착할 것이 아니라 비문 전체에 담긴 고구려의 상징성을 조망하는 일이다. 여기에 또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은 비문 서체에 대한 미학적 평가이다. 실상 100여 년에 걸친 종래의 연구결과를 검토해 보면 비문의 논쟁처에 대한 첨예한 의견들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정작 고구려의 상징성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단락은 고구려의 건국신화로부터 추모왕(鄒牟王),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으로 이어지는 왕위계승과 비문의 주인공인 광개토대왕의 행장을 기술하였다. 둘째 단락은 광개토왕 재위시절에 행해진 정복활동을 기록하였고, 셋째 단락은 수묘(守墓)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일별하면 고구려 건국의 상징성과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공적비이다. 고구려의 위대함을 상징할 수 있는 거대한 자연석에 장문의 비문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고구려의 위대성과 민족적 포용력이다. 고구려의 위대성은 건국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잘 나타나 있으며, 민족적 포용력은 수묘에 관한 기사에 잘 반영되어 있다. 묘를 지키는 사람들을 고구려인으로 하지 않고 전쟁에서 노획한 포로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묘토록 한 것은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고구려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비문 서체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입비된 시기를 살펴보면, 비문에 "以甲寅九月二九日乙酉"라고 보이므로 장수왕 2년(414)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중국으로 치면 동진 안제(安帝) 의희(義熙) 10년에 해당한다. 중국서예사와 관련지어 설명하면, 양한(兩漢)의 예서시대를 지나 위촉오 삼국시대를 거치고, 서진을 넘어 동진시대 왕희지가 난정서를 쓴 353년보다 61년이 지난 때이다. 굳이 중국서예사를 빗대어 시기를 설명하는 것은 광개토호태왕비에 나타난 서체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서체와는 전혀 다른 서풍을 띠고있음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그간의 서평을 보면, 중국의 섭창치(葉昌熾)는 "비의 글자 크기는 접시만큼 크며, 방엄(方嚴)하고 질후(質厚)한 서법은 예서와 해서의 중간서체다. 진(晉)의 의희(義熙) 10년에 건립하였으며, 고구려 건국의 무공(武功)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서 참으로 해동(海東) 제일의 보배다."라고 하였다. 일본의 니시바야시(西林昭一)는 "서체는 예서이며, 거의 방형(方形)으로 하부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 시기 한의 고예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유유(悠悠)한 자태로 순고고아(醇古古雅)하다. 이것은 거의 같은 지역 같은 시기의 모두루제기(牟頭婁題記) 묵서가 서북지방에서 통용되던 서풍을 따르고 있는 것과 대비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두 고구려의 상징성을 간과한 중국적 서평에 불과하다.

 

필자는 광개토대왕의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비문에서 자주 언급하고, 이후에도 고구려가 건흥(建興), 연수(延壽), 연가(延嘉), 태화(太和), 영강(永康) 등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국가적 상징성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비문에 사용한 서체는 형태상 고예(古隸)로 분류될 수 있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서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에 논술한 바 있는 점제현신사비와 유사성을 보이고 있으며, 또 이후에 나타나는 중원고구려비와 신라 고비와도 혈맥이 연결되어 있음을 볼 때, 고구려의 고유서체임이 분명하다. 자형면에서 볼 때에도 사용하고 있는 이체자와 풍부한 자형의 변화는 중국서예사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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