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부터 '보배' 상표 사용 광고 통해 이름 널리 알려…1966년 최우수상 잇따라
1957년 춘천양조장을 인수한 문병량 사장은 군산시 대명동 양조장 앞 집으로 이사해 살았다. 일찍 결혼한 그는 주옥환 여사와 사이에 5남3녀를 두었고, 항상 부지런하고 열성적으로 사업을 꾸려나갔다. 당시 군산에는 대한주조, 미룡주조 등 대형 주조장이 많아 경쟁도 치열했다. 문병량의 춘천주조장은 중상급 규모의 주조장이었고, 탁주와 약주 부문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근에는 군산역과 시장, 중앙동·영동 거리 등이 위치, 양조장의 지리적 조건도 좋았다.
하지만 문병량 사장은 춘천양조장을 인수한지 5년만인 1963년 '백화 강정준 회장처럼 크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이리지역 한 소주업체의 면허를 확보, 이리로 이사한다.
▲ 60년대의 소주업계
문병량 사장이 이리로 진출, 소주업에 뛰어드는 1960년대 소주정책은 우리나라의 식량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부는 1962년 1월1일 주세법을 개정하면서 과세 물건이 한 종류인 소주를 증류식 소주와 희석식 소주 두가지로 나누고 그 세율도 달리 정했다. 밀·보리·옥수수 등 곡류로 제조하는 증류식 소주에는 희석식 소주보다 3.6배에 달하는 높은 세율을 적용했다.
이어 1962년 11월28일 주세법 개정에서는 아예 고구마로 제조하는 주류 전반에 대해 주세 경감 규정을 신설, 비곡주 생산을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썼다. 당시 식량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부가 이처럼 주세경감 규정을 둔 것은 비곡주로의 전환이 가능한 증류식 소주를 고구마로 제조하도록 하거나, 아예 희석식 소주 공정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정부가 이같은 정책을 취한 것은 1961년 이후 주류업 전반의 침체 현상과는 달리 증류식 소주 생산이 증가 일로에 있어 식량 사정을 어렵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1년부터 전국의 소주 출고량 중에서 증류식과 희석식 소주의 비율은 크게 엇갈린다.
1961년 증류식 소주 출고량은 8만4229석(1석=180ℓ)에 불과했지만 이 후 크게 늘어나 1963년에는 18만7800석, 1964년 19만1229석으로 두배 가량 증가했다. 반면에 희석식 소주는 1961년 66만2063석에서 1963년 33만2992석, 1964년 23만8525석으로 절반 이상 감소했다.
이처럼 증류식 소주 출고량이 급증한 것은 곡류를 원료로 하면서도 가격이 저렴하고, 재래의 증류방식으로 제조돼 소비자 기호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류식 소주는 주정을 원료로 만드는 희석식 소주보다 제조 원가가 높아 업체 입장에서는 실익이 적었다. 이 때문에 증류식 소주업자들은 주정을 일부 섞은 혼화주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군산의 청주 기업 대한양조(훗날 백화양조)는 1963년 8월, 정부가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류 제조에 대한 제재 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청주 생산을 일시 중단해야 했다. 이 때 대한양조는 합성청주를 생산하는 한편 향후 대중주류로서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본 희석식 소주에 눈을 돌린다.
이 때 대한양조는 김제 백구에 있던 부용양조장의 희석식 소주 제조면허를 양수, 1964년 6월부터 백화를 상표로 내건 희석식 소주를 생산한다.
▲ 남선양조장 인수
춘천양조장을 운영하며 소주 시장의 가능성을 확신한 문병량 사장은 소주업 진출을 시도하게 되는데 1963년 4월 문 사장이 소주면허를 인수해 설립한 소주업체가 이리 소재 남선양조장이었다. 보배그룹의 태동이었다.
문병량 사장이 이리에 진출하며 설립한 남선양조장은 이리시 중앙동 3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리시는 주변으로 큰 들과 밭이 있어 술 원료인 쌀과 고구마 등 곡류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편리한 물류 조건을 갖춘 교통의 요충지였다. 남선양조장 인근에 중앙동 일대 번화가가 있고, 화물을 운송하기 쉬운 이리역이 지척에 위치했다.
남선양조장은 증류식 소주인 남선소주와 희석식 소주인 해양소주를 생산, 지역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1964년 4월에는 희석식 소주의 상표를 '동일소주'로 변경했으며, 소주 원료 다변화를 위해 증류식 고구마 소주를 개발해 판매했다. 당시 익산군 황등면 일대에서 생산된 고구마는 '황등고구마'라고 불렸는데, 당도가 높은 황등고구마는 맛이 좋아 시장에서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이 당시 증자기가 폭발하는 바람에 근로자가 부상하고 많은 물적 손해가 발생하는 등 불운도 겹쳤다.
문 사장이 고구마를 원료로 한 증류식 소주를 생산한 것은 주변에 고구마가 풍부했고, 또 양곡을 원료로 한 주정 및 증류식 소주 제조 금지를 유도하는 정부 정책과 무관치 않았다. 실제로 정부는 1964년 12월8일 양곡 소비절약 지침을 입안해 공시하는데, 고구마 소비 증대와 양곡 소비 절약이 골자였다. 이 지침은 먼저 고구마를 원료로 증류식 소주를 제조하는 업자에게 주정 면허를 부여했다. 또 증류식 소주 업자는 희석식 소주로 제조 종목을 바꿀 수 있고,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정과 증류식 소주 제조를 일체 금지했다.
정부는 결국 1965년 3월에 양곡을 원료로 하는 증류식 소주의 제조 금지 명령을 내리게 되며, 이 후 양곡을 원료로 하는 증류식 소주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희석식 소주 시대가 열린 것이다.
▲ 보배의 탄생
정부 정책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면서도 중소 소주업체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문병량 사장이 남선양조장을 설립할 무렵 도내에는 30여개의 크고 작은 중소 소주업체들이 군웅할거했고, 전국적으로는 진로, 삼학 등 300여개에 달했다. 그 시절에는 출혈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술 제조업체들의 탈세도 일상화 돼 있었다. 당시 소주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업계는 정부 조세수입의 1할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는데, 탈세를 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악순환 구조 속에서 남선양조장이 살아남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문병량 사장은 소비자들에게 차별화된 품질과 기업 이미지를 줄 수 있 방법을 생각하던 중 상호를 변경하기로 했다. 남선주조란 상호는 일반 주조장 이미지가 강해 대중들에게 아무런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판단, 기업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상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문병량 사장은 1965년 3월 새로운 상표를 '보배(寶盃)'로 변경하고, 상호는 보배양조공업사로 정한다.
보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배에서 만든 보배소주야말로 인간 관계를 더욱 보배롭게 만들 수 있다며 소비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어갔다.
이어 문병량 사장은 1965년 7월 서울출장소를 개설하고 서울로 진출, 영업망을 확대한다. 서울시내를 달리는 전차 내에 보배소주 광고가 부착됐고, 라디오 광고방송, 장수무대 등에서 보배소주를 알리는 광고가 전국에 울려퍼졌다.
보배는 1966년 6월 전국 소주 인기투표에서 최우수상인 재무부장관상을 수상하고, 이어 8월에 열린 전국주류경진대회에서도 최우수상인 국세청장상을 수상하는 등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도내에서는 군산의 대한주조가 상호를 백화로 변경하고, 청주 뿐 아니라 소주까지 생산하며 사세를 확대하고 있었다. 보배의 사세가 상대적으로 부족했지만, 도내 소주업계는 백화소주와 보배소주 구도가 형성돼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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