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문인들은 나에겐 어머니 같은 존재"…가람·백릉 선생, 식민지시대 우리의 자화상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내가 늦게 오는 날이면 따로 밥상을 차려놓았다가 아랫목에 묻어놓은 밥을 올려 "아나, 먹어라"하고 주셨습니다. 밥 뚜껑을 열면 방금 한 것처럼 더운 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하고 이 방에 서니 그런 향수가 떠오릅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지난달 31일 부안 전북학생해양수련원에서 열린 '2010 전북도민해변문예대학'(이사장 김남곤)에 초대된 군산 출생 고은 시인(77)은 "이 고장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운을 떼었다.
"1930년대에 내가 태어났는데, 그 때 우리 고장에는 가람 이병기 선생밖에 없었을 겁니다. 가람 선생은 한국 현대시조의 중흥을 가져온 분이지요. 물론 전통사회에서 많은 조상이 있었지만, 근대 100년의 문학의 풍경에서는 가람 선생이 가장 으뜸인 자리에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그는 가람 선생에 이어 백릉 채만식 선생을 떠올리며, "가람과 백릉 선생은 식민지 시대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덧붙였다.
"그 때는 감히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엄두를 내지 못했을 때입니다. 글도 잘 몰랐으니까요. 이 때 이런 분들이 씨를 뿌려서 전라북도 문학과 문인사회가 싹 튼 것으로 나는 추정합니다."
고은 시인은 "신석정은 단순한 서정시인이 아니다"며 말을 이어갔다.
"1946년 서울에서 열린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석정 선생은 지금 내가 볼 때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꽃덤풀')을 즉흥적으로 썼습니다. 사회주의적 성향이 있는 대회였지요. 석정 선생은 부안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까지 했는데, 다른 지역 같았으면 벌써 죽었겠지만 사람들이 구명운동을 해서 공립학교인 전주고에 들어갈 정도로 덕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석정 선생은 그래서 50년대 전라북도 문예의 표상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고 회고했다.
고은 시인은 백양촌 신근 선생에게 빨간색 볼펜으로 편지를 썼다가 격렬하게 항의를 받은 기억, 석정 못지않게 키가 크고 허리가 꼿꼿한 데다가 걸어갈 때에도 턱이 올라가던 김해강 시인에 대한 기억을 비롯해 '내 아주 무서운 친구'라는 소설가 최일남, 석정의 사위가 된 최승범, 삼례의 이기반, 이리(현 익산)의 홍석영 등 전북을 기반으로 한 문인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저는 시를 쓰지 않을 때에는 폐인에 가까운 존재가 됩니다. 때때로 세상에 대해 판단 정지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또 아주 멍청해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시 한 편이 나오면 눈이 번쩍거리고 뭔가 살아야겠다는 용솟음같은 게 차오르곤 하죠. 시를 쓴 뒤에는 뭔가 멍해져서, 마음 속의 지평선을 막막하게 바라보곤 합니다."
고은 시인은 "우리말 없이는 세상과 만날 수 없다"며 "인터넷을 통해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 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 것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열린 해변문예대학은 전북문인협회(회장 이동희)가 마련한 자리. 200여명이 참가했다. 김건중 한국문협 부이사장과 이동희 전북문협 회장이 각각 '문협의 과제'와 '문학의 힘 시의 힘'을 주제로 강연을 했으며, 참가자들은 가람반과 석정반, 백릉반, 미당반으로 나눠 반별 문학 토론 시간과 백일장 등을 가졌다.
이동희 회장은 "전북문협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지역사회가 예향 예도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문학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이라며 "전북문협 회원들은 물론, 등단 기회를 엿보며 문학 수업에 매진하고 있는 문학 애호가들의 참여와 활동으로 이런 목표들이 앞당겨질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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