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시인. 백제예술대학 교수)
역설(逆說)은 모순 어법으로 일종의 '낯설게 하기'이다. 얼핏 보기에는 모순된 논리 같으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 말 속에는 일종의 진리를 품은 깊은 통찰이 숨어 있다. 시인들은 이러한 통찰의 세계를 보다 밀도 있게 압축한 역설의 언어를 통해 시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침묵이 곧 웅변', '지는 것이 이기는 것',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자식 매 한 대 더' 등이 그것이다.
'침묵'이 '웅변'이라는 말은 분명 모순이다. 그러나 '웅변'이라는 것도 실은 '오랫동안 참아 왔던 침묵의 언어'들이 때를 만나 웅변으로 변한 것이기에 '웅변은 곧 침묵'이 된다. 만해의「님의 침묵」에서도 님은 갔지만, 그 님이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이별이 곧 만남'이라는 역설이 가능케 된다.
구름이 비가 되고, 비가 내려 식물의 뿌리와 줄기에 스며들어 꽃이 되고 또 그것이 열매가 되어 맛있는 과일로 익어가는 끊임없는 변전(變轉), 그것은 동일성(identity)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면 그리 놀라운 기상(奇想)도 반전도 아닌 사물의 순차적 변화 과정의 다른 이름들일 뿐이다. 형식 논리에서 보면 'A'는 'A?'일 수가 없다. 그러나 비유(詩)의 세계에서 보면 'A'는 'A?'이 되어 시공을 초월한다.
인연에 따라 그때그때 형상을 달리하고 있을 뿐,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동일성의 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이것이 곧 시적 변용(deformation)의 단초가 된다. 사물이 여러 모습으로 변해가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역설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로 이어져 있다.
'사나이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그 누가 오래토록 객수에 젖어 있나/한 번 큰 소리로 천지를 뒤흔드니/눈 속에 핀 복사꽃도 흐드러져 날리네' (-한용운, 「오도송 悟道頌」)
만해가 어느 겨울 오세암에서 좌선할 때, 문득 깨치게 되었다는 선시(禪詩)다. '객지'가 '고향'이고, '눈 속'에서 '복사꽃'이 핀다. 이 또한 기상이고 역설이다. 하지만 우주적 선의(禪意)에서 보면, 인생 자체가 이 세상 나그네에 지나지 않고, 봄에 피는 꽃도 실은 겨울의 눈 속에서 이미 배아(胚芽)되어 개화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시에서 흔히 보게 되는 유(有)와 무(無) 그리고 공(空)과 색(色)을 넘나드는 다양한 반전과 역설 등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본질에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다. 결국, '같다(the same)'는 것이 아니라 '동일선(the identical)상'에 놓여 있는 '같은 것들의 다른 모습'이요,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不一不二)'의 '연속성의 원리'로 이어진 불교의 연기론적 인식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 김동수(시인. 백제예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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