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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밥상] (10)김년임 가족회관 대표

어릴때 보리빵 먹고 탈나자 어머니가 쑤어준 맛 못잊어…전주음식 자존심 지키고 싶어

찹쌀고추장에 쓱쓱 비벼 한 입, 혀에 고소함이 감긴다. 전주비빔밥의 입맛 돋우는 정겨운 놋그릇에 콩나물이며 고사리, 표고버섯, 황포묵, 숙주나물, 잣, 은행 등이 맛깔스레 담겨져 나온다. 김년임 전주 가족회관 대표(72)의 손끝을 거치면 이처럼 화려하고 정갈한 성찬이 된다. 2006년 전주시가 그를 '전주 음식 명인 1호'로 지정해준 것은 35년 밥장사만 했어도 집 한 채 없었던 그간의 세월을 보상해주는 듯 했다.

 

 

완주군 초포면 출생인 그는 어린 시절 유복한 집안에서 1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약했어요. 어른들이 "저 거 어떻게 살 지…." 하면서 혀를 끌끌 차곤 했죠. 보리밥만 먹으면 배앓이를 하곤 했구요."

 

솜씨 좋은 어머니는 김치를 담거나 간장, 고추장, 된장, 가양주를 담글 때 반드시 아들딸들을 불러 세워 가르쳤다. '주걱잡이(부엌일하는 여인)'는 아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어머니의 손놀림, 재료를 대하는 자세를 보는 것만으로 훌륭한 교육이 됐다.

 

어머니는 특히 음식을 조리할 때 머릿수건을 매고 옷자락을 깔끔하게 매무새한 단정한 차림으로 임했다. 가족회관에 가면 머릿수건을 두르고 새하얀 가운과 앞치마로 무장한 그의 모습은 바로 어머니의 모습이다. 이런 어머니 덕분에 온갖 성찬을 다 먹어본 그지만, 유독 생각나는 건 보리빵과 피문어죽과 같은 소박한 음식이다. 눈물겹게 그리운 이 음식 앞엔 늘 어머니가 있었다.

 

"어린 시절 친구 집에 갔다가 삼베 이불을 깔고 보리빵 찌는 걸 봤어요. 얼마나 맛있게 보이던지…. 근데 내가 남의 집 음식 안 먹었거든요. 그게 자꾸 눈에 밟혀서 보리빵만 생각하고 집에 왔죠."

 

어머니는 막내딸이 보리빵을 못 잊어하는 걸 보고, 늦저녁 빵을 만들어주셨다. 어찌나 맛있었던지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탈이 났다.

 

"며칠 설사하면 갤 줄 알았는데 너무 아파버리니까, 엄마가 겁이 났대요. 삼례 병원에 데려갔더니, 양기가 워낙 부족한 아이라고, 약도 몽땅 짓고 주사도 맞혔는데, 돌아와서 또 사흘을 앓고 탈진까지 하더래요. 내가 죽어 버릴까봐 엄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죠. 그 때 만들어주신 게 피문어죽이었어요."

 

방망이로 다듬은 피문어를 푹 고아서 죽을 쑨 어머니. 그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맛"이라고 했다.

 

그는 심장 수술 뒤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어머니가 해주시던 피문어죽이 그리웠다. 당시 간호해줄 사람이 없어서 중학교 3학년짜리 조카가 병실을 지켰다.

 

"그 조카가 그 때 피문어 죽을 쑤어서 가져왔어요. 죽이 쉬어도 다 먹었습니다. 조그만 아이가 그걸 한 번 해보겠다고 한 게 기특하잖아요."

 

오징어보다 더 작은 피문어를 사다가 찹쌀, 대추에 물을 몽땅 붓고 끓였으니, 맛은 신통치 않을 수밖에.

 

"피문어 냄새도 안 나고. 맹물 맛도 아니어서 처음엔 못 먹겠더라구요. 그런데 자꾸 먹으라고 해서 간호사에게 부탁해 다시 끓여 먹었죠. 먹으면서 참 많이 울었어요. 고향의 향수 같아서요."

 

그가 비빔밥을 하게 된 것도 어머니 덕분이다. 집에 귀한 손님이 올 때 어머니가 냈던 상이 바로 비빔밥이었다.

 

"동네에서 소를 잡는 날 비빔밥을 했습니다. 고슬고슬하게 밥을 짓고 갖은 나물을 볶고 묵은 고추장과 육회를 얹어 냈지요. 정월대보름엔 솥에 열두 가지 나물을 넣고 기름을 둘러 간장에 비벼 먹기도 했습니다. '장독비빔밥'이라고 하는 전통비빔밥이었죠."

 

1970년대 중반 그는 비빔밥을 전문적으로 짓기 시작했다. 전주에서 지켜가야 할 대표적인 맛이라고 여겼다. 그의 비빔밥상 반찬 수는 최소 10여 가지. 비빔밥에 무슨 찬이 필요하냐고 되묻는 이들이 많지만, 전주에 가면 푸짐한 상을 받아볼 수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도 돈은 많이 못 벌었죠. 구질구질한 내 방 한 켠에 엄마 사진이 있어요. 자기 전에 "엄마, 오늘 하루 잘 산 건가? 정말 엄마한테 가고 싶다. 정말 보고 싶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 엄마 손맛을 최고로 여기면서 살았고, 또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으니, 그걸 제자들한테 물려주는 게 내 몫이 아닌가 합니다."

 

칠순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도 그는 꿈을 꾼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처럼 그의 손은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혀있다. 귀한 손님을 위한 손맛을 중요시 여겨 비닐장갑조차 절대 끼지 않았다. 너무 거칠고 투박해진 손을 보면 숭고한 마음마저 든다. 전주의 맛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은 지난한 세월이 묻어났다. 그는 앞으로 "그 때 그 시절 결혼식·환갑 등에 사용됐던 음식을 재현해 전시하고 싶다"며 "전주 음식의 자존심을 지켜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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