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名士)와 명물(名物)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명사는 주류 사회에 속하지만 명물은 비주류 사회가 주무대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로 꼽힌다.
조선 후기는 영ㆍ정조 때 꽃 핀 새로운 시대 분위기와 상업 문화로 시장(市場)이 대중의 공간으로, 갖가지 풍경이 펼쳐지는 무대로 부상한다. 살아 움직이는 이 공간은 명물들을 위한 곳이었다. 명물들은 온갖 부류가 몰려드는 도회지 시장과 골목에서 마음껏 능력을 펼쳤다.
이곳에는 성대모사 전문가인 구기(口技), 저잣거리에서 책을 읽어주는 전기수, 뚜쟁이 조방꾼, 만능 엔터테이너 광대가 있었다. 양반이 권위를 잃고 시장에서 날품팔이, 걸인이 되기도 했고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하층민이 시인으로, 한양 제일의 서당 선생으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한문학자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펴낸 '조선을 사로잡은 꾼'(한겨레출판)은 조선후기 명물들의 이야기이자 당시 기층민중의 삶을 생생히 기록한 '만인보'다.
조선 영조~헌종때 시인 조수삼(趙秀三.1762~1849년)의 '추재기이(秋齋紀異)'에 간략히 언급됐던 명물들을 입체적으로 조명해 냈다. 다른 문헌에 기록된 어떤 이와 동일인물인지, 어떤 상황과 맞물리는지 실증적으로 고증해 더 풍부하고 사실적인 기록을 만들어냈다.
18세기 후반 '교육 1번지' 성균관. 부근에 있던 우암 송시열의 고택에 한양 최대의 서당이 들어섰다. 훈장은 성균관 유생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노비 출신 정학수. 신분은 비천했지만 '정 선생'으로 불리며 교육자로서 큰 명성을 얻었고 국왕 정조까지 그의 존재를 알았다. 경쇠를 울려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려야 할 정도로 학생이 몰렸다. 당시의 최고 '스타강사'였던 셈이다.
두 주먹이 들락날락할 정도로 입이 컸던 거지 두목 출신의 광대 달문은 전국적으로 인기를 누린 당대 최고의 엔터테이너였다. 외모는 천하의 추남이었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광대였다. 황진이의 미모에 빠진 지족선사를 조롱하는 만석중놀이, 산대놀이의 하나인 철괴무, 남사당놀이의 땅재주넘기와 비슷한 팔풍무를 주특기로 세상살이에 지친 백성들을 위로했다.
이 책에는 조수삼이 명백히 밝히지 않았던 나무꾼 시인 정초부의 명성과 활약상, 짤막한 기록으로 남아 있던 재담꾼 김 옹이 김중진이라는 사실도 소개된다. 여승과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던 이가 거부로 유명했던 무인 남휘라는 사실도, 사재를 털어 고향 빈민들을 구제하고 천하를 쥐락펴락했던 제주 기생 출신의 여갑부 김만덕의 삶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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