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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정읍 솔나무떡방앗간 김용희 대표

"정직한 먹을거리가 떡집 전설 키웠죠"…다양한 메뉴로 연매출 10억…유명 홈쇼핑등서 판매 1위

최고급 식재료와 '정성'을 담아 성공적인 떡집 전설을 써가고 있는 김용희·남행자씨 부부. ([email protected])

TV 드라마로 인기를 끌고 있는 '제빵왕 김탁구' 덕분에 전국의 빵집에 불이 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고 있다. 높은 시청률은 드라마적 요소를 다양하게 갖췄기 때문이겠지만,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자신의 길을 열어가는 김탁구에 대한 인간적 공감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제빵왕 김탁구를 시청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남모르게 눈물을 삼키고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읍 제일시장 솔나무떡방앗간 대표 김용희씨(47)도 그중 한 명이다.

 

▲ 혹독했던 서울 상경기

 

정읍 제일시장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전통시장. 특화된 굴비를 중심으로 한 1차 산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시민들이 제일시장을 얘기할 때 전통떡을 빼놓지 않고 있다.

 

어느순간 제일시장의 브랜드마크가 돼버린 전통떡. 그 뒤엔 김용희 사장이 있었다.

 

김 사장의 고향은 내장산자락에 위치한 정읍시 쌍암동 솔티마을.

 

김 사장은 오형제와 함께 이곳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나 부친 작고이후 가세가 급속히 기울었다. 5형제 중 둘째였던 김사장은 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감행했다.

 

당숙집에 기거하면서 떡만드는 일을 거들던 김 사장은 군 제대후 운전기사, 염색공장 등을 전전하며 거친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하던 일마다 체질에 맞지 않아 '다시는 쳐다보지 않으리라'던 떡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88년쯤 아내를 만나 수원시에서 처음으로 자기가게를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배가 고팠다. 빚을 내 얻은 가게방에서 비키니옷장 하나 놓고 먹고자며 고생하기 3년. 통장에 고생한 보람이 조금씩 쌓이는게 보였다.

 

그즈음 고향에 혼자 계시던 어머니가 건강이 나빠졌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5년여에 걸쳐 어렵게 아내를 설득하고 고향땅을 밟은 것이 96년. 서울 하늘아래서 뼈저린 고생을 시작한지 15년 되는 해였다.

 

▲ 고향 정착, 그리고 전설의 시작

 

정읍으로 내려오면서도 먹고 살일이 걱정이었다. 떡만드는 기술이 전부였던 김사장은 나름대로 지역의 떡시장 조사에 착수했다.

 

당시 정읍 시장에서는 바람떡이나 인절미, 시루떡, 가래떡 정도의 전통적인 떡만 판매하고 있었다.

 

대도시서 일하던 감각으로 김 사장은 자신감이 생겼다. 동생인 용복씨도 합류했다.

 

가진 돈의 두세배를 들여 커다란(?) 가게를 차렸다. 주변에선 '떡 팔겠다고 전통시장에(그것도 남의 가게 전세로) 그 많은 돈을 투자하다니...'하며 고개를 흔들어댔다.

 

아랑곳 않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김 사장은 추석 20여일 전 '솔나무떡방앗간'을 열었다.

 

결과는 누구의 예측도 어긋났다.

 

아침 여섯시부터 줄을 서기 시작한 손님들로, 넉넉히 준비했던 떡은 오전 10시에 동이 났다.

 

떡공장은 불이 났다. 삽시간에 한시간여씩 기다리는 손님들로 시장통이 마비됐다.

 

'솔나무떡방앗간'은 급소문을 타면서 추석 대목 내내 가게 양쪽으로 30여m 인간띠가 만들어졌다. 이후 설이나 추석이 다가오면 30m 인간띠는 솔나무떡방앗간의 풍속도가 돼 버렸다.

 

떡집의 전설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 떡의 장인으로 우뚝 서다

 

승승장구하던 솔나무떡방앗간은 4년전 전자상거래를 시작, 누적 방문객수 200만을 돌파했고 1일 평균 3천-5천명이 방문하고 있으며 연간 10억원 이상 매출을 올리고 있다.

 

옥션, G마켓, 동대문마켓 등 내로라하는 홈쇼핑에서 떡판매 전국 1위를 달리고 있다.

 

밀려드는 전국의 소비자들을 위해 시장내 떡집외에 내장산아래 떡방앗간을 증설했다.

 

김 사장의 '전설'은 어떤 각도에서 보면 남다른 게 별로 없다.

 

철들기 전 남보다 심하게 겪은 생활의 어려움을 승화시켰고, 먹거리에 대한 올바른 생각 정도가 경쟁력이었다.

 

시장에 대한 철저한 검증으로 천편일률적이던 떡집의 메뉴를 다양하게 개발했고, 포장용기의 차별화, 최상급의 식재료 선택, 그리고 음식에 대한 정성(15년여 쌓은 노하우)이 전부였다.

 

그러나 남들 다 할 수 있을 정도의 이런 노력이 '대박'의 밑걸음이었다.

 

김 사장은 "최고급 쌀을 공급하는 정미소에 여러번 반품을 시켰더니, 정미소주인이 '그렇게 까탈스럽게 하면 납품을 못하겠다'고 하더라"고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김 사장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열심히 한 길만 파면 먹고사는 길은 수도 없이 많다"면서 "육체적 노동을 싫어하고 편안함만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뒤엔 부모들의 잘못된 교육관이 도사리고 있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 고향을 향한 애정, 그리고 꿈

 

어렵사리 고향에 정착, 떡집으로 성공한 김 사장은 5형제와 함께 더 높은 도약을 위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자신을 키워준 고향 솔티마을에 떡 체험마을을 만들기로 한 것. 이미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했고, 인근 마을민들까지 적극 합류했다.

 

김 사장은 사업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뒤늦게 학업을 마치기도 했다. "하루만 지나면 굳어지는 떡을 해결할 방법은 없는지 등 떡을 만들면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바쁜 와중에 고교와 대학(전북과학대)을 졸업한 김 사장은 "어렵게 살아서 그런지 어려운 사람들이 눈에 밟히는 게 사실"이라며 남모르게 하고 있는 사회환원사업을 애써 숨긴다.

 

김 사장은 "이제껏 이런저런 핑계만 대왔지만, 불우청소년과 노인들에 대해 나름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수줍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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