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은 참 길었다. 무더위, 장마, 늦더위…. 건강이 좋지 않아 외부 활동을 자제해왔던 수필가이자 시조시인인 최승범 전북대 명예교수는 이제 기력을 되찾은 듯 보였다.
"'미식가' 보다는 '잡식가'라는 말이 더 적당해요. 먹보가 아니래도 음식을 먹고 마시는 일은 즐겁지요. 그것이 육신뿐만 아니라 정신을 살찌운다는 생각까지 하면 즐거워집니다."
오랜 세월을 이겨낸 혜안을 얻은 나이. 잘 먹는 일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맛있는 음식을 글로 풀어내는 솜씨는 맛깔스런 양념.
"맛 하면 전라도 음식을 먼저 꼽잖아요. 음식하면 전라도였다고. 양반은 아전만 못하고, 아전은 기생만 못하고, 또 기생은 소리만 못하고, 소리는 맛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말도 있지요. 전주 음식만큼 뛰어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1985년 식생활운동본부에서 출간한 「식생활」에 3년간 전주 음식 이야기를 연재했다. 1988년엔 「풍미산책」(부제 '한국 전통의 맛과 멋을 찾아서')을 통해 계절별 음식 소개로 '음식수필'이란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면서 인기를 모았다. 먹거리를 세시풍물과 연결시켜 쓴 「한국의 먹거리와 풍물」(1997) 이후 산문집 「풍미기행」(2006)까지 맛의 역사를 줄줄이 엮어낸 셈이다. 온갖 산해진미를 다 맛본 그가 꼽는 잊을 수 없는 음식은 대체 무엇일까. '점심값이 만 원이 넘으면 죄 짓는다'는 평소 소신대로 역시 소박한 음식들을 이야기했다. 무 초무침(?), 굴비, 하란젓….
고개를 갸웃대는 기자에게 그는 "음식은 값도 싸면서, 깨끗하고, 정갈해야 돼요. 상 크게 벌려 놓고 먹는 것은 죄로 가는 길입니다."라고 못을 박는다.
"가을이 되면 무 떡잎이 나오잖아요. 그 솎은 무를 뽑아 가지고, 맑은 우물물에 씻어요. 초도 좀 치고, 양념해서 무쳐. 학교 다녀오면, 어머니가 점심 먹으라고 하면서, 보리밥에 무 초무침을 내놓아요.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은 먹어볼 수도 없고."
굴비도 입맛을 당기게 하는 '밥도둑'이다. 단단한 머리에 황금투구를 쓴 굴비는 아닐지라도, 잘 말려 착 휘어진 굴비는 없어서 못 먹는 귀하신 몸이었다.
"보리쌀 항아리에서 잘 말린 굴비제. 그걸 꺼내 가지고 여름철 손님이 오시면 대접해요. 굴비는 하나도 버릴 게 없어. 대가리부터 꽁지까지. 손님 대접해야 하니까, 우리는 먹질 못해. 석쇠에 노릇노릇하게 구워낸 굴비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명절이 돌아오기만 하면, 굴비는 추천 메뉴. "굴비 한 두름에 10~20만원 할 때였다"는 그는 아무리 비싸더라도 꼭 한 번 가족들과 영광 굴비를 먹어보라고 권하곤 했다.
부안이 고향인 아내와 결혼 후 젓갈도 즐겼다. 새우알로 담근 하란젓은 처음엔 고약 같이 보여 입에 대지도 못했다.
"하란젓은 보통 젓갈과는 다르지요. 민물새우에서 그 알만 따내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만큼 귀한 것이죠. 작고한 현준호가 그걸 즐겼어요. 하란젓을 페니실린병에 담아와 술안주로 먹으면서,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거나하게 취한 날이면, 머리맡에 콩나물 '자리끼(밤에 자다가 마시기 위해 잠자리 머리맡에 두는 물)'가 있어야 했다. 술에 찌든 속을 '확' 풀리게 하는 음료. 아내가 끓여준 칼국수도 단골 해장 메뉴였다.
"안식구가 이걸 참 잘했습니다. 다듬잇돌에 밀가루 반죽해서 끓인 칼국수를 먹으면, 속이 개운해져요. 덕분에 배로 먹었지요."
모내기철 갈치 토막을 하지감자에 곁들여 간장에 조려낸 갈치조림, 메뚜기 날개를 떼어 지짐이판에 기름을 둘러 볶아먹던 메뚜기볶음, 덩어리진 선지에 콩나물과 파가 소복히 담은 선짓국 등 입맛 당기는 음식 이야기도 양념으로 얹혀졌다.
음식점에 가면 장맛부터 봤다는 그는 화려한 상차림은 아니라 하더라도 젓갈 하나, 고추장 볶이 하나라도 맛을 제대로 낼 줄 아는 상차림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전주의 음식이 수입산 식재료와 입맛을 평준화시킨 조미료, 손맛의 오랜 공력 없어져 본연의 맛을 잃었다며 아쉬워했다.
"전주가 자랑할 수 있는 맛이 무엇인가에 관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맛의 본향인 전주가 이전의 명예를 되찾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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