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속적인 질박함 묻어난 신라시대 한문
1988년 울진군 봉평리에서 논에 객토작업을 하던 중 글씨가 새겨진 길다란 돌이 발견되었다. 높이 204cm에 가로는 위폭이 32cm, 아래폭이 54.5cm, 하단의 최대폭은 70cm인 자연석이다. 좁고 긴 형태의 화강암 한쪽 면에는 상당히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또 하나의 신라고비가 발견된 것이다. 석문을 통해 밝혀진 글자는 10행에 약 400여 자이며,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도 30여자에 이른다. 그동안 발견된 비에 비하여 그 명문이 많아서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비의 명칭은 관례대로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덧씌워 '울진봉평신라비'로 명명하고,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해 12월에 국보 제242호로 지정하였다.
학계에서는 명문의 첫머리에 보이는 '甲辰年正月十五日 喙部牟卽智寐錦王'를 근거로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시기는 신라가 동북방면으로 진출하던 때로서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충할 수 있는 많은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다.
앞에서 다룬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와는 성격이 다른 정치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파악된 비문의 실체는 "신라의 영토확장으로 울진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가자 이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신라에서 이를 응징하기 위해 6부 회의를 열어 대인(大人)을 파견해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못하도록 경계 삼아 비를 세운 것"이라고 한다.
명문의 글씨는 종래 중국 남북조의 영향을 받은 해서체이나 예서체의 모습도 보인다고 평하였으나, 특정한 서체로 규정할 수 없는 모호성을 가지고 있다. 이전의 다른 석각문자에서 볼 수 있듯 정교함보다는 돌의 자연성을 활용하여 글자를 구성하고 각자하였다. 역시 비의 형식이 정형화되기 이전의 한 형식으로서 토속적인 질박함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형식미를 갖추기 이전의 석비를 통해 신라의 생활상과 서예문화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비문을 판독하면서 알려진 사실이지만 봉평비는 신라식 한문구성을 하고 있어 그 내용파악이 쉽지 않았음을 상기할 때, 신라시대 한문학의 실례로서도 연구가치가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봉평비에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보충하고, 나아가 이를 정정할 수 있는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법흥왕의 율령반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물론 6부제의 실시 및 왕권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종래에는 법흥왕 7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6부(六部)의 성립 시기를 대개 6세기 이후로 보았으나, 봉평비의 내용을 근거로 이보다 시기가 앞선다는 새로운 의견들이 제기되었다.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대사의 연구에서 1차 자료에 해당하는 석비의 발견은 그 자체가 큰 사건이다. 명문에 보이는 수많은 인명과 관직을 통해 신라의 관등제를 연구할 수 있으며, 이전의 신라비에서도 나타나듯 살우(殺牛)를 통한 의식이 나타나는데 당시 맹약 의식(儀式) 연구에도 단초를 제공한다. 비문에서 노인촌에 반란의 책임을 물었다는 것에서 원로에 대한 사회적 위치를 찾아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의 풍경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야기되는 사회적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또 후세에 어떻게 경계삼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바로 울진 봉평비이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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