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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누가 '백의종군' 이라 말하는가

조상진(본지 논설위원)

얼마전 경남 일원을 다녀왔다. 400여 년전 충무공 이순신이 삭탈관직 당하고 걸었던 백의종군(白衣從軍) 코스를 둘러보기 위해서다. 갔던 김에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남해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 그리고 한산대첩의 승전고를 높이 울렸던 한산도까지 강행군을 했다.

 

경상남도는 이들 이순신의 발자취를 역사문화 콘텐츠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었다. 2015년까지 1590억 원의 국·도비를 들여 추진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이순신 프로젝트'로 이름 붙여진 이 사업 중 백미는 '백의종군로 관광명소화 사업'이 아닐까 싶었다. 걷기 열풍에 힘 입어 성공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여기서 잠깐 백의종군에 대해 살펴보자. 백의종군은 조선시대 무관에게 내리는 일종의 형벌이었다. 보직도 계급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워 속죄하라는 뜻으로 출전시키는 것이다.

 

경남대 김봉열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백의종군은 총 60차례가 있었다. 대부분 전시(戰時) 또는 전투와 관련된 것이다. 이 가운데 이순신이 유일하게 두 번에 걸쳐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았다. 첫번째는 임진왜란 발발 5년 전인 1587년 10월 두만강 북쪽 녹둔도(鹿屯島)에 침공했던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한 전투였다. 두번째는 1597년 정유재란 발발시였다.

 

물론 여기서 백의종군은 두번째를 말한다. 오늘날 백의종군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다.

 

당시는 임진왜란 초기와 달리 전세가 교착된 상태였다. 조선을 돕기 위해 출정한 명나라도 뒷짐을 지고 있는 형세였다.

 

이런 와중에 이순신은 원균과 불화를 빚고, 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략상 수비를 강화하고 공격에 신중을 기했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일부 중신들의 모략으로 음력 2월 25일 통제사 직에서 해임돼 서울로 압송되었다.

 

다행히 우의정 정탁 등의 도움으로 사형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순신은 4월 3일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해 수원을 거쳐 평택- 아산- 공주- 논산- 여산- 전주- 남원- 구례- 하동- 합천 초계 원수부에 도착했다. 이어 8월 3일 진주시 원계면 손경례 집에서 재임명될 때까지 백의종군하게 된다. 약 4개월간이다. 그동안 고문을 견디고 옥문을 나선 기나긴 여정이 얼마나 고단했을 것인가. 풍전등화 같은 조국과 엉망인 정치권 사이에서 마음고생은 또 얼마나 컸을 것인가.

 

이처럼 숭고한 뜻을 지닌 '백의종군'이 요즘 너무 쉽게 쓰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몇가지 예를 들겠다. 정동영 전 민주당 대선후보는 대선에서 패배한 뒤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혔다.

 

또 최근에는 청문회에서 낙마한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가 '무신불립(無信不立)'을 내세우며 "백의종군의 자세로 최선을 다해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돕겠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다. 신한은행 사태관련 금융인도 백의종군을 말한다. 기업인이나 운동선수들도 패배하거나 난처한 입장에 처하면 이를 들고 나온다. 심지어 술집 종업원을 폭행해 물의를 빚은 개그맨까지 들먹인다.

 

개나 걸이나 백의종군이란다.

 

하지만 백의종군이라는 말을 쓸 때는 적어도 이순신의 처지를 한번쯤 생각했으면 한다. 공공선(公共善)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자세 말이다. 백의종군은 얼굴 두꺼운 사람들이 넋두리로 쓰는 면피용 수사(修辭)가 아니다.

 

/ 조상진(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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