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죽·무밥·전어속젓·매생이죽…'맛의 고장' 전주의 따스한 기억 불러내"
안도현 시인(49·우석대 교수)은 비빔밥처럼 잘 비벼진 전주에서 '적당히' 외롭게 산다. 시인은 전주는 1시간 거리에 평야와 바다, 산이 있어 비빔밥처럼 잘 비벼진 도시라고 말한다. 이렇듯 전주는 적당히 외로워하고, 적당히 그리워할 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외로워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거나 아니면 인간들이 너무 많아 안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전주는 그런 허기를 모두 채워주는 곳이죠."
대건고 시절 문예반 스타였던 그는 익산 원광대로 유학을 왔다. 소설가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를 배출한 데다 문예장학생을 뽑는 학교라는 점에 매료됐다. 전라도 쌀을 먹고 산 지가 30년. 이 땅은 시의 자양분이 됐다.
경북 예천에서 자란 그는 처음 콩나물국밥을 맞닥뜨렸을 때 선뜻 먹기가 힘들었다. 뭐 이런 죽밥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제 막걸리집을 비롯해 비빔밥, 한정식, 백반, 돌솥밥, 국수, 떡갈비에 오모가리탕, 가게에서 파는 맥주와 안주까지 곁들여지는 '가맥'을 즐기는 전주 사람이 다 됐다.
청어구이에 닭고기 미역국, 생두부, 더덕, 번데기 등 열 몇 가지 안주가 '쫙' 깔리는 막걸리집 안주상은 전주를 못 떠나게 하는 음식들이다.
"음식이란 단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게 아닙니다. 음식은 만드는 이의 정성과 맛보는 이의 기쁨을 함께한다는 점에서 감정을 나누는 좋은 매개체죠. 시 창작 강의를 할 때도 '음식을 잘 만들어야 시를 잘 쓴다'고 말하곤 합니다. 음식이 환기하는 기억과 풍경을 불러내는 일도 시인의 몫이거든요."
시인은 이어 "라면을 끓여도 자기 식대로 요리하려는 생각이 창의적 시 쓰기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고 덧붙였다.
한번은 어느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시켰더니 병어회가 안주로 나왔다.
"촌놈아, 병어회는 깻잎의 뒷면으로 싸먹어야 입안이 꺼끌하지 않아."
이름 모를 주모의 지청구가 어쩐지 축복 같았다. 시인에게 음식이 주는 행복은 이런 것이다. 시'예천 태평추'는 '태평추'의 기억을 쫓아가게 하는 작품이다. 태평추는 채로 썬 묵에다 뜨끈한 멸치국물 육수를 붓고 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김과 깨소금을 얹어 숟가락으로 떠먹는 음식. 시인은 "눈 많이 오는 추운 날 점심 쯤 먹으면 더할 수 없이 맛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전주를 '맛과 멋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먹고 마시는 일이 풍류의 하나라면 전주는 풍류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 2004년 출간한 시집 「간절하게 참 철 없이」(창비)는 우리의 전통 먹거리에서 소재를 찾아 지나간 추억의 발자취를 더듬은 작품. 갱죽, 무밥, 전어속젓, 매생이국 등 토속 음식은 옛 공동체의 따스한 기억들을 불러일으켰다.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죽'('갱죽')을 먹어야 했던 시절 먹이는 것은 가장의 버거움과 긍지가 있었다. 매생이국에서 사랑을, 간장게장에서 모성을 떠올렸다.
시인이 올해 펴낸 동시집 「냠냠」 에서는 아이들에게 먹는 일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아이들에게 밥이 하늘처럼 귀하고, 밥 한 숟가락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주고 싶었어요. 음식이 넘쳐나는 요즘, 아이들이 제 동시를 읽고 안 먹던 음식에 관심을 갖고 요리도 직접 해보며 먹는 일의 소중함을 느꼈으면 합니다."
"음식을 맛보면 그대로 만들 수 있다"는 그는 동시집 출간을 준비하면서 초등학교 식단을 점검하고, 음식 관련 논문도 챙겼다. 음식을 만들 때 나는 소리와 씹을 때 나는 소리, 냄새까지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누룽누룽 누룽지, 파마한 라면, 퀴퀴한 김치 악당, 빗줄기로 만든 국수, 불자동차 떡볶이 등은 이렇게 탄생됐다.
시인은 휴대전화가 없다. 4년 전 우연히 휴대폰을 잃어버린 후 아예 안가지고 다닌다. "집 전화, 학교 전화가 있기 때문에 불편함이 전혀 없다"는 그는 "굳이 말하자면 휴대전화 없는 생활도 전주여서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시인은 전주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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