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시인·백제예술대학 교수)
나는 누구인가? 태어날 때도 혼자 태어나 세상을 떠날 때도 혼자 떠난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그 게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있음으로 하늘 위도 하늘 아래도 존재한다. 그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다.
하늘도 땅도 너와 나도 내가 있음으로 존재한다. 그러기에 내가 아닌 그 무엇도 나의 구원이 될 수 없으며, 내가 아닌 그 누구도 나의 의지처가 될 수 없다. 이런 절대 고독의 세계에 방기되어 있는 것이 나이기에, 내가 존귀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또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나무는 서 있다 / 길 아닌 길가에// 하늘과 땅뿐이로다/ 흔들려도 /지나가는 바람 붙들지 않고 // 어둠 속에서도/ 밤을 새워 스스로 길이 되는 // 나의 이 황홀한 가슴 /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 // 나무는 서 있다/ 하느님처럼// 서 있는 나무가 곧 길이다. (졸시 「나무」전문)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 누구도 아닌 내 스스로가 하느님이 되고, 내 스스로가 부처님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절대 고독과 절대 존엄의 세계를 필자는 스스로 '황홀한 가슴'이라고 칭했다. 결국 나를 구성하는 것도, 나를 결정하는 것도, 나를 부정하는 것도 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스스로 길이 되고 하느님이 되어야 하는 실존적 고독. 그것이 나의 자존(自尊)이고 외로움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탄생 직후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을 걸은 다음, 오른 손과 왼 손으로 각각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선언하셨다. 이는 하늘 위와 하늘 아래 가장 존귀한 존재가 나요, 오로지 나만이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 말씀 속에는 비단 석가모니 부처만이 아니라, 우리 중생들도 누구나 할 것 없이 그야말로 천상천하에 오직 홀로 높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존엄하다는 '본래 부처설(本來佛)'을 통해 내가 곧 부처가 되어 부처처럼 살라는 뜻이다. 신분제도가 엄격한 고대 인도 사회에서 이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에 대한 일대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흔히 안하무인이며 독선적인 사람을 일컬어 '유아독존'이라고도 하지만 이것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먼 해석이다. 부처님은 사람이 천상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며 그 존재가치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위대하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세상이 모두 고통스러우니(三界皆苦) 내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해 주리라(吾當安之)"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나 진정 자신의 고통을 치유해줄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뿐이다. 모든 사물을 귀하게 보면 한 없이 귀하지만, 하찮게 보면 하찮은 존재가 된다. 공주가 되느냐 하녀가 되느냐, 이는 오로지 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 내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니까.
/ 김동수(시인·백제예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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