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시인·백제예술대학 교수)
'약속'은 서로가 서로를 믿고 다짐한 언약이다. 훗날 어떤 핑계를 앞세워 말을 바꿀까 염려가 되어 미리 다짐한 뜨거운 가슴이다. 그래도 못 미더워 이를 문서로 만들어 수결을 남기고 심지어 혈서까지도 쓴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을 존귀하게 세우는 일이요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본다.
중국 광무제 때 송홍(宋弘)이라는 사람은 가난했지만 훗날 대사공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마침 홀로 된 광무제의 누이가 송홍을 좋아하게 되자 광무제는 송홍을 불러 "흔히 '사람들은 귀하게 되면 옛 친구를 버리고, 부유해지면 아내를 바꾼다.'는 말이 있는데 어찌 생각하느냐"며 그를 회유하였다. 그러나 송홍은 "가난하고 어려울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고(貧賤之交 不可忘), 가난할 때 고생을 함께한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내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송홍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다. 비록 그들이 훗날 변치 않기로 그리하여 그들의 약조를 오늘날처럼 무슨 공증을 따로 한 바 없었다 하더라도, 한 때의 연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음은 인간의 신의요 기본적인 도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인간적인 믿음과 신뢰가 서로 간에 없다면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어느 봄날 법정 스님이 섬진강 가를 여행하게 되었다. 매화꽃이 하도 예쁘게 핀 어느 산자락 외딴 집이 눈에 들어와 올라가 보았다. 허물어져 가는 빈 집 벽 한 쪽에 서툰 글씨로 '우리 엄마 아빠는 돈 벌어서 빨리 자전거 사주세요? 약속' 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친구들이 자전거 타는 걸 부러워하면서 엄마 아빠께 자전거 하나 사달라고 졸랐을 그 아이를 생각하며 가슴이 찡했다던 법정 스님의 글이었다. 세월이 지나 그 아이도 이젠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어린 날의 약속을 생각하며 남보다 열심히 살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약속이란 다른 사람과의 약속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약속도 중하고 귀하다.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진정 그리고 뜨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 날 나도 한 때 월사금을 제때에 내지 못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던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어머니에게 붙들려 혼이 나면서 함께 울던 날이 있었다. 그때 어린 나이에도 나는 '훗날 커서 어머니의 고생이 헛되지 않게 해 주겠노라'고 혼자 마음속으로 약속을 한 바 있었다.
그래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빨리 자라 무엇이 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한 인간이 정직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면 그 끝은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그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후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주제로 한 「새벽달」이란 시를 통해 시인이 되었고, 그로인해 또 오늘 내가 봉직하고 있는 대학의 교수도 되었으니, 어찌 보면 그 어린 날 자신과의 약속이 오늘의 나를 세워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김동수(시인·백제예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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