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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도반의 집

박성숙

문득 오래 묵은 도반의 집이 그리워져서 곰칫재 아랫동네에 살고 있는 그의 집을 향해 길을 나섰다. 곰칫재를 넘기 직전 국도변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허리띠처럼 가늘고 길게 뻗어있었다.

 

입동이 지난 날씨인데도 찬 기운이 별로 없이 마치 봄날처럼 따뜻하고 화창하다. 가을걷이가 끝난 터라 논바닥엔 여기저기 볏단들이 흩어져 있다. 그 사이로 살진 닭들이 뒤뚱거리며 뛰놀고 있다.

 

내가 젊은 시절 막 사업을 시작할 무렵,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네가 만일 가을 태생 닭이었더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으련만……." 5월생 닭띠 딸을 두고 안타까워하신 어머니의 푸념이다.

 

가을 닭은 한낮의 햇살로 더욱 붉게 보이는 볏을 흔들며 모이가 지천으로 깔린 논바닥에서 위풍 당당히 노닐고 있다. 초라하기 짝이 없던 젊은 날의 내 모습에 견주어 어머니가 부럽게 여길 풍요의 표상이었다. 오뉴월 뙤약볕에 뛰어다니며 고작 껄끄러운 보리 낱이나 주워 먹을 신세와는 견줄 바 아니었다.

 

그때에 나는 어머니에게 "그럼 보리도 없는 겨울 닭띠는 다 굶어 죽었겠네."하고 웃었었다. 어머니와의 사연은 그것이 비록 슬프고 아린 사연이라 해도 무지개 너머 강처럼 아름다이 기억됨이 태생의 본능일까? 어쩌면 사랑의 속성일 게다.

 

김장은 아직 철이 아닌 듯, 배추며 파가 텃밭에 그대로 있고, 일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마을엔 인적 하나 없고 적막만이 고이 감돈다. 나는 염소가 집을 지키고 있는 그녀의 빈집 마루에 걸터앉아 청정무구한 고요를 가슴 뿌듯하게 누린다. 내 집이 아닌데도 내 집안에서 누리는 편안함 그 이상이다.

 

건너 편 허청에는 수수 이삭이며 조 이삭, 마른 옥수수가 가지런히 매달려 있고, 씨앗이 들었음직한 누런 봉투들이 벌집처럼 오밀조밀 천장에 매달려 있다. 과연 살림 솜씨 좋기로 정평이 난 그녀의 집답다. 처음에 들어섰을 땐 빈 집처럼 여겼던 곳이지만 막상 둘러보니 집안에는 여러 식구들이 옹기종기 많이도 모여 살고 있다. 그날 원행을 하여 집을 비운 도반을 만나지 못해 서운했다.

 

그녀가 돌보듯 이 집에는 누구라도 들어와 살 수 있는, 생존하는 데 필요한 만단의 요소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정말이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꼭 필요한 것들이 그다지 많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새삼 들게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지려고 탐을 내고 싸우고 속이고 탈취한다.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도대체 그 큰 재화의 더미가 어째서 그렇게 탐이 나는 것일까.

 

단정한 언어로만 다듬은 산문 같고, 연필 자국이 드러난 수채화와도 같이 맑은 이 집의 정경을 욕심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어미라는 위세로, 자식들을 위한답시고, 넉넉한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복을 더 주소서 빌고 있는 여인들에게도. 정말이지 나도 언제쯤이면 더깨가 앉은 두꺼운 욕심을 다 내려놓고 이 집안의 청정을 닮은 맑은 내면의 삶을 살게 될 수 있을까.

 

'귀거래사'를 부르며 전원으로 돌아가 맑은 삶을 살아낸 도연명처럼 "구름은 무심하게 산을 넘어가고, 새는 지쳐서 둥지로 돌아온다. 고요히 해는 지고, 외로이 서 있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나의 마음은 평온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수필가 박성숙씨는 1991년 <문예사조> 로 등단했다. 수필집「풀꽃이고 싶다」·「꽃비가 오네」·「쪽씨를 심던 날」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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