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10년 전 영화의 거리를 생각해보자. 지금의 CGV 자리에는 피카디리 극장이 있었고, 전주시네마 자리에는 코리아 극장과 뉴코리아 극장이 있었으며, 프리머스 자리에는 씨네21 극장이 있었고, 또 메가박스 자리에는 대한극장이 있었던 시절, 10년 전 어렵게 시작한 전주국제영화제는 이 옛 극장들에서 모든 영화들을 상영했다. 사람들은 노후한 극장시설 때문에 이런저런 불편함을 호소했지만 영화는 상영되었고, 전국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열심히 영화를 보았다. 시간은 흘렀고, 이 극장들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멀티플렉스로 변신하면서 이런 불만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영화의 거리는 다행히 아직도 그 때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많은 극장들이 모여있는 전주 영화의 거리는 대한민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해외출장 때 방문했던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공간이다. 전 세계의 많은 영화제는 이제 거의 '쇼핑몰 영화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쇼핑몰의 윗층에 자리잡은 멀티플렉스에서 열린다.
특히 전통적인 극장이 적은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에서 열리는 영화제들은 거의 틀림없이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영화제를 개최한다.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시설도 좋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지만, 영화를 보고 거리 한켠에 앉아 본 영화를 곰곰이 생각해 보거나,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친구와 영화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가 쉽지 않다.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소비를 유혹하는 공간은 이것을 쉽지 않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의 거리를 가진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
얼마 전부터 영화의 거리에 있는 극장들의 사정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프리머스는 작년부터 문을 닫았고, 아카데미 아트홀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영업을 하지 않고 있고, 다른 극장들도 별로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한다. 누군가는 몇 년 안에 메가박스만 남게 될거라는 이야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영화의 거리를 더 이상 영화의 거리라고 부를 수 없는 날이 조만간 올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거리에 극장이 없다면, 전주국제영화제는 어떻게 될까?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의 거리와 함께 성장해왔고 영화의 거리도 영화제를 통해 변모해왔다. 전주시가 구도심 활성화 대책을 수립해야 했을 만큼 사람들이 찾지 않았던 영화의 거리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거리가 되었다. 예쁜 카페도 많아졌고, 예쁜 가게들도 많아졌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영화제 기간이 아니어도 영화의 거리에 나와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고,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난다. 그리고 영화제 기간이 되면 아름답게 변신하는 영화의 거리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영화제가 지금의 영화의 거리를 만들었다고 말하긴 어려워도 지금의 영화의 거리를 있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화의 거리는 영화제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지만, 영화제를 하기에 이보다 좋은 공간을 난 본적이 없다. 이 거리는 내가 다녀본 전세계 영화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문화적 잠재력을 가진 공간이다. 영화상영과 축제를 한꺼번에 구현할 수 있는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공간이다. 그래서 난 이 공간에 있는 극장들이 망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자리잡아 영화의 거리를 계속 영화의 거리라고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영화의 거리가 소비 지향적인 공간이 아니라 좀더 문화적인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동문사거리 근처에서도 이제는 찾기 어려운 중고책방도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고, 이제는 다운로드에 밀려 망해가는 중고 비디오와 DVD 가게도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고, 인사동처럼 갤러리도 몇 개 생기면 좋겠다. 여기에 가끔씩 평소에도 영화의 거리에서 거리 공연을 볼 수 있고, 일주일에 한번쯤은 작은 벼룩시장도 열리면 더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공간에서 전주국제영화제가 매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만의 꿈이 아니었으면 정말 좋겠다.
/ 조지훈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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