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중앙회 정성철 상무(56·부행장)은 농협내에서 '영업의 달인'으로 불린다. 정 상무는 지난 2001~2006년 과천지점장으로 근무할 당시 지점의 자산규모를 10배 가량 키운 화려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정 상무가 과천지점에 부임했을 당시만 해도 여수신 규모는 500억원 안팎. 정 상무는 관할지역 기업들을 상대로 다각적인 영업전략을 펼친 끝에 부임 5년만에 여수신규모를 5000억원 이상으로 늘렸다.
지난 1월 신용담당 상무로 승진한 그는 "당시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는 등 운이 좋았다"고 전제하면서도 "관할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는 코오롱 그룹을 비롯한 대기업들과 프로젝트파이낸싱(PF)사업을 확대했고, 이를 바탕으로 지점의 외형을 키웠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얼핏 무뚝뚝해 보인다. 하지만 정 상무와 얘기를 나누면 생각이 달라진다. 사석이든, 공석이든 좌중을 압도하는 수사(修辭)를 자랑한다. 그는 이같은 특유의 친화력과 뚝심을 자산삼아 평생을 '농협맨'으로 살아왔다.
"과천지점장으로 근무하면서 처음 대기업들과 거래를 시작할 때였어요. 당시 학연이나 지연으로 연결된 대기업 관계자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결국 '수시로 드나들면서 사람들을 만나자'는 생각을 앞세웠고, 이를 실천했죠"
그는 "중국에서 최고 부자라는 와하하그룹의 쭝칭허우 회장이 영선반보(領先半步·성공하려면 반 걸음만 앞서 가라)를 금과옥조로 여긴다는 말이 있다"면서 "굳이 중국의 부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누구보다 먼저 다니고, 누구보다 발품을 팔았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은행 직원은 너무 똑똑하면 예금주는 돈을 안맡긴다'는 농담섞인 조언을 건네곤 합니다. 예금주는 약간 어눌해보이는 은행직원을 좋아한다는 말이겠죠. 어찌보면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고객들 앞에서는 약간 무능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는 그러면서도 "38년동안의 농협근무기간동안 남을 속이지는 않았다"면서 "무엇보다 후배들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상사로 생활했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회의를 주재하면서 '가급적 짧게'를 중시한다. 또 직원들의 인화단결과 능동적인 업무능력을 키우는데 주력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회의시간이 30분을 넘기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면서 "상사가 후배직원들에게 군림하려고 들면 조직구성원은 피동적으로 변하게 된다"고 말했다.
"일선지휘관이 지시일변도의 모습을 고수하게 되면 직원들의 창의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지점장이 차장이나 부장에게 실적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당장 실적은 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손해라는 신념이 컸어요. 사실 그동안 업무성과를 놓고 상부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직원들에게 상부의 질책을 전달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미 직원들은 상부의 질책을 간접적으로 들었겠죠. 이런 과정을 몇차례 거치면 직원들은 능동형 인간으로 변하곤 합니다"
남원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전주사범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부친을 따라 전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북중을 졸업한 뒤 전주고(제50회)에 입학했던 그는 전주공고를 잠시 거친 뒤 전주상고를 졸업했다.
"당시 집안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탓에 인문계를 다닐 형편이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전주공고에 편입했는데, 적성이 맞지 않더군요. 결국 다시 2학년때 전주상고로 옮겼고 이 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졸업과 함께 농협과 인연을 맺었다. 완주농협에서 첫 근무를 시작한 그는 지난 84년 서울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출향인사'가 됐다. 출향직후 경기 고양과 성남 등에서 근무했던 그는 지난 86년부터 중앙회 본부로 들어와 7년 넘게 감사실을 지켰다. 이후 과천지점장을 비롯해 전북도지부 신용사업부본부장, 정부중앙청사지점장, 중앙회 영업부장 등을 거쳐 농협중앙회 상무대우로 승진했다.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고향에서 신용사업부본부장을 제외하면 근무할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대목이죠. 어찌보면 본부장을 거치지 않고 상무가 된 몇 안되는 임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고향 근무가 일천한 때문인지, 전북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면서 "앞으로 고향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을 거듭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감사실 검사역에 근무할 당시 주로 경상도지역을 담당했는데 이 지역의 활기찬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면서 "고향 사람들도 보다 활기차고 적극적인 마인드를 키웠으면 한다"고 지적했다.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