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리움미술관을 떠올리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연상된다.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의 경계를 허물어뜨린 팝아트의 정신이 담긴 그 작품이 삼성 특검의 숨은 그림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의 미술 취향은 거의 '보안'에 가깝다. 하지만 리움미술관의 대표적인 해외 소장품을 보면 미니멀리즘 미술이 독보적이다. 고미술 중심으로 수집을 했던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이나 남편 이건희 전 회장과 달리 홍 관장은 현대미술 수집에 주력해왔다. 리움미술관은 한국 근현대미술과 1945년 이후 서양의 현대미술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해 국내·외 근현대미술의 흐름을 보여준다. 리움은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가의 성(Lee)과 미술관(museum)의 어미(um)를 조합한 이름. 지난달 12일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 들어섰을 때 루이스 브루주아의 '거미'가 '떡'하고 버티고 있었다. 작품명은 '엄마'. 거대한 철로 만든 거미가 왜 강한 모성을 뜻하는 걸까. 다리 끝을 자세히 보니, 날카로운 낫이다. 늘 자식에게 퍼주는 모성이 때로는 위험을 가져다줄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듯 했다. 역시 대가는 다르구나!
△ 가장 매혹적인 조합을 경험하다
리움미술관은 '건축의 명소'다. 마리오 보타(스위스), 장 누벨(프랑스), 렘 쿨하스(네덜란드) 등 세 명의 건축 거장들이 이뤄낸 품격을 자랑한다.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일본에서라면 이 거장들에게 한꺼번에 모을 용기는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0~9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는 해외 건축가들에게 고층 빌딩과 공항, 병원과 같은 특수 건축물만 설계 의뢰해왔다. 이마저도 한국의 정서와 예산에 맞게 원안이 곧잘 수정됐다. 그러나 2004년 리움미술관이 실체를 드러냈을 때 기대는 벗어나지 않았다. 고미술 전시장 뮤지엄 1은 마리오 보타가 한국 도자기를 빚은 도공의 마음을 따라 관람객이 산책하듯 즐길 수 있도록 부드러운 곡선의 모양. 현대미술관 뮤지엄 2는 장 누벨이 녹슨 스테인리스 스틸과 유리로 현대미술의 첨단성을 표현, 한국의 근현대미술과 동시대 국제미술을 전시하고 있다. 기획전시실과 교육기능을 담당한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는 렘 쿨하우스가 세계 최초로 블랙 콘크리트를 사용해 공중에 붕 떠있는 듯한 미래적 공간을 구현해낸 것이다. 홍 전 관장의 부친은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으로 현대미술에 주목한 컬렉터였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집안 환경에서 성장한 까닭인지 홍 전 관장은 아동 미술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 리움에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를 세웠다.
△ 역시 리움은 단연 최고였다
리움미술관의 한국 고미술 소장품은 국내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 받는다. 불교미술(1층)·고서화(2층)·분청사기(3층)·청자(4층)관에 소장된 고미술품을 보면 '국보급 미술관'이다. 이날 이곳을 방문한 대다수가 일본인 관광객이었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달항아리(보물 제1440호) 앞에서 눈인사를 건넸다. 둥근 달을 떠올리게 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달항아리는 보는 이의 마음을 정갈하게 만든다. 백자의 전성기인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빚어졌으며, 크기가 커서 위와 아래 부분의 반원을 따로 만든 뒤 접합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순백의 미와 좌·우 균형감은 조선의 미의식을 재현하고 있으나, 국보로 지정된 달항아리는 백자대호(국보 제262호)가 유일하다. 조선시대 1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분청사기인화원권문병은 선의 흐름과 장식이 매우 단정하면서도 정교함이 돋보인다. 일정한 장식을 도장에 새겨 동일한 문양을 반복적으로 찍은 후 백토를 채워 장식효과를 내는 인화기법으로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미가 드러난다. 하지만 리움미술관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인왕제색도'는 만날 수 없었다.
현대미술관에서도 나의 눈은 호강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인체 조각 '거대한 여인'은 극단적으로 가늘고 삐쩍 마른 인체를 통해 비인간화된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의 실존적 고독을 상징한다. 아무리 가벼워진들 땅에서 떠날 수 없는 존재의 무게가 버거워 보였다. 그의 조각'걷는 사람'은 지난해 1190여 억원에 낙찰, 역대 최고가를 경신하기도 했다.
삶의 비극과 섬뜩한 고통을 보여주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방안에 있는 인물', 추상 표현주의 대가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화'무제', 추상 표현주의의 철학과 정면 대치되는 앤디 워홀의 '팩토리' 등 오늘날 세계 미술을 주도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물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하는 어려운 작품도 많다.
무엇보다도 가장 아쉬운 대목은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소리를 보는 경험'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전시를 넋 놓고 보다가 그만 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쿨하게 돌아서면 좋으련만, 왜 그리 아쉬움이 남던지….
△ '꼼데가르송 길' 들어봤나요
리움미술관 일대에 '꼼데가르송 길'이 만들어졌다. 명품 브랜드 '꼼데가르송'의 대형 단독 매장이 문을 열면서 '꼼데가르송 길'이란 애칭이 붙었다. '꼼데가르송' 창업자 가와쿠보 레이는 상복 같은 옷, 전위적인 디자인, 뗑뗑이 무늬 등으로 '파격'의 패션 여왕. 그는 모두가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괴짜다. 이 매장에서 파는 옷은 지나치게 개성적인 데다 고가의 옷임에도 불구하고 불티 나듯 팔린다고 한다.
꼼데가르송 맞은 편에는 파리바게뜨로 유명한 SPC그룹의 '패션 5(passion five)'가 있다. 1층에는 수제 초콜릿, 푸딩, 케이크 등 세계 각국의 디저트 제품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갤러리, 2층에는 브런치와 파스타 등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아뜰리에가 있다. 부드러운 스폰지 케이크와 커스터드 크림, 통밤이 가득한 밤 일등롤은 사계절 내내 맛볼 수 있는 '패션 5'의 스테디셀러 제품. 매년 제빵 업계의 트랜드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빵을 담아가는 봉투 마저 아기자기한 백화점 미니백처럼 생겼다. 하지만 기자는 이날 빵 대신 밥을 선택했다. 미술관 2동을 도느라 너무 허기가 졌으므로. 반나절 안에 이 모든 것을 보겠다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다. 오후에는화랑미술제 현장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한번도 깨어있는 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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