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진 국민대 교수, 전주시에 한지백과사전 '한지' 기증
일본 화지 공장을 돌다가 문득 어떤 가정에 아찔해졌다. '만약 한지업체가 하루 아침에 다 사라진다면?' 한지를 하루 빨리 기록해야 한다는 불안함이 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여러 차례 건의했다. 이제 국내에 남은 한지 생산업체는 24곳 밖에 남지 않았다고, 누군가는 한지를 기록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몇 번인가 퇴짜를 맞고 지쳤을 무렵 희소식이 왔다. 한지백과사전 「한지」(1~4권)는 그렇게 탄생됐다. 김형진 국민대 임산생명공학과 교수(50)는 전국의 24곳 한지 생산업체를 다니면서 한지 생산지역별 분포도를 만들고 한지 제조 공정 용어를 설명하면서 한지의 물성 분석까지 시도했다. 한지를 재단하다 손이 잘릴 뻔한 사고도 있었다. "도대체 나와 한지가 무슨 인연인가?" 싶기도 했지만, 뜻 모를 책임감이 들었다.
14일 전주를 방문한 그는 송하진 전주시장에게 「한지」를 전달하면서 "전주에는 꼭 있어야 할 것 같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150질만 한정판으로 펴낸 「한지」는 전국 지자체 중 유일하게 전주시에만 기증됐다.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라 원주 한지가 저를 불러줘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전주에서만 인연을 맺게 되네요. 전주가 '두번째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명예시민증이라도 받아야 할까 봐요."
그는 본래 제지공학 전공자다. 200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선왕조실록 밀납본 복원기술 연구에 참여하면서 한지를 접하게 된 그는 "종이를 반밖에 몰랐다"는 걸 실감했다.
"일본에서 「화지대전」을 봤어요. 일본 사람들은 화지도 모자라 우리나라·중국 종이까지 수집해서 기록하는데, 우리는 한 지 한 장도 제대로 보관이 안 돼 있다는 사실에 위기감을 느꼈죠."
「한지」 발간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한지산업진흥을 위한 기술지원사업으로 선정됐다. 그는 2009년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한지 대장정을 시작했다. 경상북도 안동 한지를 시작으로 충청북도 단양 단구 제지, 경상북도 영주 선비촌 한지, 강원도 원주의 원주 한지 등 전국을 안 다닌 곳 없이 누볐다. 공휴일도 없이 1년간 한지의 물성 실험, 자료 분석, 1만2000장에 이르는 한지의 재단, 11만 쪽에 이르는 속지까지 모두 수작업으로 해냈다.
"한지 한 장 한 장을 어떻게 만들었는 지 상세히 기록했어요. 일본의 「화지대전」은 화지를 엮은 것에 불과하지만, 나는 전국에 있는 한지 309종을 수집하고, 종이를 분석해서 제조 공정까지 엮었죠. 한지 제조 설명서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는 한지는 백 번의 손길을 거쳐서 만들어진다고 할 정도로 많은 시간과 정성이 요구되는 종이라고 했다. 전통 방식인 외발(흘림)뜨기를 통해 종이결을 더 얽히게 하는 데다 두 장의 습지를 하나로 합쳐 만들기 때문에 더 질기고 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지가 일본의 화지나 중국의 선지보다 품질이 더 좋은 종이라는 국수주의적 논리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지가 세계 최고의 종이라는 믿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종이의 쓰임은 각기 다르잖아요. 질긴 종이가 늘 우수한 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만 한지를 알리는 일에 소홀해왔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발벗고 나서보자는 겁니다. 우리 종이를 지켜내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한지의 세계화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특히 일본 화지가 고문서 기록 종이로 선점하고 있다"며 한지를 응용한 다양한 문화상품을 제작을 제안했다.
"한지를 접하며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수 천 년을 한결같이 이어온 한지처럼 한 길만을 걸어왔다는 점이죠. 이들이 있어 한지가 영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강원대 임산공학과와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한 뒤 영국 UMIST 석사·박사과정을 졸업한 그는 현재 한국펄프·종이공학회 교육위원장, 산림과학연구소장, 전주시 조선왕조실록복본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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