蹴海移山, 飜濤破(?)嶽
축해이산, 번도파(파)악
바다를 차고 산을 옮기니 파도가 뒤집히고 멧부리가 까불리네.
蹴:(발로)찰 축/ 海:바다 해/ 移:옮길 이/ 飜:뒤칠 번, 뒤집힐 번/ 濤:물결 도/ 破:낄 파/ ?:(키질하여) 까불릴 파)/ 嶽:멧부리 악, 큰 산 악
창암 이삼만 선생이 남긴 또 하나의 명작이다. 글 내용은 중국 당나라 사람 이사진(李嗣眞)이 쓴〈서후품(書後品:서예에 대한 품평 후편〉에 나오는 말로서 중국의 서성(書聖:서예의 성인) 왕희지(王羲之)와 왕희지 못지않게 명성을 떨친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를 비교 평가하면서 왕헌지의 초서에 대해 품평한 말이다. 해당부분을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 번역하자면 "바다를 차고 산을 옮기는 것 같아 파도가 뒤집히는 것 같기도 하고 큰 멧부리가 까불리는 것 같기도 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앞의 두 구절인 '바다를 차고 산을 옮긴다.'는 비유는 운필법(運筆法) 즉 붓을 운용하는 필법을 비유한 말이고, 뒤의 두 구절 "파도가 뒤집히는 것 같고 큰 멧부리가 까불리는 것 같다."는 말은 운필을 제대로 했을 때 나타나는 예술 효과를 표현한 것이다. 살아있는 필획을 구사하기 위한 운필법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발로 한 번 바닷물을 툭 차면 바닷물이 쫙 갈라지듯 붓이 마치 종이를 가르기라도 하려는 듯이 종이를 파고들며 나아가는 운필법이고, 다른 하나는 육중한 산을 밀어서 이동시킬라치면 이동하는 면과 땅이 산의 무게만큼 무겁게 달라붙으려 하듯이 붓과 중이가 그렇게 무겁게 밀착하게 하는 운필법이다. 전자를 흔히 '금시벽해(金翅劈海:금시조라는 새가 바다를 가르듯)'라는 말로 표현하고 후자를 흔히 '향상도하(香象渡河:코끼리가 강을 건너듯)'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처럼 바다를 가르고 산을 밀어 옮기는 듯이 하는 필법으로 써 놓은 글씨는 당연히 파도가 뒤집히는 것 같은 힘이 있고 큰 산이 까불대며 덩실거리는 것 같은 육중한 리듬감이 있다.
창암 이삼만 선생은 이 '蹴海移山, 飜濤破(?)嶽'이라는 구절을 이 구절이 말하는 필법대로 쓰고 또 이 구절이 제시한 예술효과를 낼 수 있도록 썼다. 정말 파도가 뒤집히는 것 같고 큰 산이 춤추는 것 같은 글씨이다. 이사진의 〈서후품〉원문은 '?'인데 이삼만은 그것을 '破'로 바꿔 썼다. '破'로 써도 뜻은 통하지만 '?'만은 못한 것 같다. 혹 창암 선생이 잠시 착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작품은 현재 전남의 옥과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구풍첩(口諷帖)」이라는 큰 작품의 일부분으로 전한다. 원래는 가로로 쓴 작품인데 게재의 편의상 세로로 재구성하였다.「구풍첩」은 앞면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고 후면은 이삼만이 원교의 글씨를 보고서 나름대로 어깨를 견주어 볼 양으로 쓴 것인데 이 글씨 말고도 해서와 초서 등 여러 체의 글씨가 더 있다.
이 글씨에 대해서 혹자는 '앵우필(鶯羽筆:앵무새 깃털로 만든 붓)'로 썼다고 하는데 '앵우필'이라는 말 자체가 전거(典據)가 없는 말이라서 믿기 어렵다. 오히려 갈필(葛筆:칡뿌리를 잘라 끝을 두드려 만든 붓)로 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갈필에 대한 기록은 더러 눈에 띤다. 필자는 전에 한약재로 사용하는 건갈(乾葛:말린 칡)을 먹물에 불려 그것으로 글씨를 써본 적이 있는데 창암의 이 글씨와 비슷한 효과를 경험하였다. 그리고 창암의 다른 작품 중에서도 갈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은 더러 눈에 띤다. 앵우필일까, 갈필일까? 창암은 매우 서민적인 서예재료와 도구를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사용한 재료와 도구에 대해 연구한다면 그의 진작과 위작을 판별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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