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을 돌아다니면 재미있는 현수막들이 걸려 있다. 어느 부부의 큰 자녀가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현수막부터 누구 집 누구 자녀가 어느 대학에 합격 되었다든가. 누구 집 차녀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자식들 자랑을 하는 이런 저런 현수막들이 바람에 펄럭인다. 배경이야 어찌됐든 귀엽고 재미있고 웃음이 절로 나온다. 우리 친구 아들이 박사학위를 받아 동갑계 이름으로 축하 현수막을 마을에 걸어 주었더니, 돼지 한 마리를 잡은 적도 있다. 정말 축하할 일들이다. 이런 저런 자식자랑 현수막들을 마을 입구에서 볼 때마다 가슴이 찡 할 때가 있다. 어려운 시골에서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고 일류 대학에 합격을 하고 박사 학위를 딸 때까지 얼마나 부모들의 애간장이 녹고, 얼마나 많은 고생들을 했겠는가. 확성기를 들고 몇날 며칠 고함을 지르며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며 자랑을 하고 싶을 것이다. 충분이 납득이 가고 수긍이 가고도 남는다.
강연을 하러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그 도시의 입구나 거리에 걸려 있는 현수막들을 보면 그 고을의 현안 문제들을 금방 파악할 수가 있다. 곧 숨 넘어가는 내용부터 그냥 아예 공갈 협박에 가까운 내용들까지 한 가지 현안을 두고 내건 현수막 형식과 내용들이 다채롭다. 현수막 내용들을 보면 '결사' '죽을지 언정', '목숨을 걸고', '죽기를 각오'하고 같은 목숨을 담보로 한 내용들도 있다. 국책 사업 유치를 위한 그 고을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의 각오와 시민들의 결의는 누가 보아도 절박하고 타당하고 어떻게든 성사를 시켜야 할 것들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다급해도 책임을 질 말을 해야 한다. 국책 사업이 유치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전 시민을 향해 죽어버리겠다고 공언을 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자라는 아이들이 보고 있다. 그런 뻥 치는 어른들의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이 아이들에게 '뻥' 교육된다.
전라북도에 LH 본사 유치가 무산되었다고 한다. 도민들의 분노와 박탈감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죽기를 각오 했던 현수막들이 찢어지고 색 바랜 채로 여기 저기 나 붙어 바람에 펄럭인다. 맥 풀리고 우울하고 을시년스럽다. 서울에 사는 딸아이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 야, 전주에 아직 삼성이 안왔냐?" '드디어 삼성이 전북에 온다.'는 현수막은 정말이지 우리들을 더 초라하게 하고, 쓸쓸하게 한다.
/ 김용택 본보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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