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성(기획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순창 회문산 길은 적막했다. 가파른 골짜기 곳곳이 울창한 숲 따라 엄숙한 정적이 흘렀다. 장맛비 사이로 내린 햇살은 따가울 정도로 선명했다. 6·25전쟁 61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일상을 털고 우리 민족의 역사적 비극을 거슬러 찾아 나섰다. 거기엔 이념의 전선(戰線)이 살아 있었다.
당연히 잘 안다고 생각했던 회문산(해발 837m)이었지만 그곳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그걸 너무 몰랐고, 잊고 살았던 내가 부끄러웠다. 스스로 박제화 된 전쟁 이미지에 젖어 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었다. 허나 어떤 역사적 사건도 이념과 정치적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체험한 점에서 답사의 위안을 삼는다.
회문산은 6·25전쟁 당시 지리산과 함께 최대의 빨치산 근거지였다. 남한을 공산화하려고 했던 무장 게릴라들의 본거지로서 실화소설 '남부군'의 무대가 될 만큼 유난히 민족상잔의 상처가 깊게 파인 곳이다. 어쩌면 '빨치산 아이콘'이 아닐 수 없다.
빨치산은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에서 패퇴한 남로당 계열 패잔병으로 일부가 산세 험한 이 산에 은거했다. 본격적인 활동은 6·25전쟁 발발 이후다. 700명 이상을 헤아렸던 이들은 국군과 경찰을 기습하고 민간인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 그러나 토벌작전 끝에 1954년 1월 사실상 종말에 이르렀다.
빨치산은 이 과정에서 정상 부근 가막골에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와 임시 간부학교인 정치훈련원을 세워 활동의 근거로 삼았다. 가보려고 했어도 실체가 없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곳 가는 길에는 빨치산들이 썼음직한 비트들이 실감났다.
산림청과 순창군은 11년 전 중턱인 회문산 자연휴양림에 유격대 사령부를 복원했다. 회문산의 상징물로서 탐방객에게 전쟁의 상처와 아픔을 반공차원에서 기억해 내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게 어긋났다. 왜곡되어 문제점을 노출시킨 것이다.
비전향장기수들이 '남녘 통일 애국열사(빨치산) 추모제'를 이곳에서 열고 모중학교 교사가 학생들을 인솔해 파문을 일으켰다. 일부 빨치산 출신자들은 추종자들을 동반해서 의식화 장소로도 악용했다. 회문산 일대를 그들의 성역화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판국이다.
그런 빨치산 사령부 모형물을 걷어냈다. 산림청은 그 자리에 '회문산 역사관'을 짓기로 하고 막바지에 있다. 새롭게 탈바꿈한다는 시도다. 역사관에는 빨치산의 생성·소멸과정과 이들로 인한 피해내용을 담은 영상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다. 건전한 역사·안보의식을 기르는 산 교육장이 주목적이다. 하산하면서 비목공원과 양민희생자 위령탑에 들러 1만여 회의 빨치산 토벌 전투에서 숨져간 넋들을 위로하고 돌아왔다.
6·25는 휴전으로 끝난 전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으로 보아야 한다. 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사태야말로 이에 대한 산증인이 아닌가. 6·25와 닮은꼴이다. 북한이 몰래 기습하고 자신과 무관하다고 잡아떼는 꼴이 똑 같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서조차 괴담수준의 유언비어(流言蜚語)로 덧칠되고 있어 유감이다. 어떤 이념과 논리도 국가안보 보다 우선일 순 없기 때문이다.
역사관의 영상물 클로징 멘트가 머릿속에 생생하다. "회문산의 빨치산은 사라졌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는 빨치산을 기억해야 한다.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최동성(기획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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