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성(본지 기획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추석이 다가온다. 종교의식 치르듯 올해도 고향 길에 오른다. 실물경제 경고음이 귀성객들의 마음을 바닥으로 내려놓지만 민족 대이동은 변함없을 것이다. 그곳엔 조상이 있고 반가운 부모 형제와 친척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 데 모여 차례와 성묘를 통한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 확인은 자신과 공동체를 성숙하게 만들어 새삼 '민족의 명절'을 실감하게 한다.
그렇지만 말이 명절이지 대물림 행사를 치러야 하는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흐뭇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명절이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제례(祭禮), 특히 조상 제사로 일관되는 국가라는 이유에서다. 유교 문명의 종주국인 중국과 주변국인 일본에서도 조상 제사가 목격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조상 제사를 지내는 유일한 나라가 된 까닭,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이 위패와 지방(紙榜) 앞에 은덕을 비는 까닭을 정작 잘 알지 못하겠다. 감격스럽고 위엄스러운 분위기가 있을 것이다. 반면 남녀의 불합리한 역할, 가족 간 불공평한 노력봉사와 비용조달에 가슴앓이를 하고 품앗이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소소한 갈등이 나오는 게 요즘 추세다. 안쓰러운 몸짓들이다.
고려 말까지도 명절은 하늘과 자연을 경외하는 집단축제였다.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한 조선은 창궐했던 무속과 민간신앙을 일소하고 제천(祭天)과 제사(祭祀)로 전격 대치했다. 15세기 말 성종은 '경국대전'을 편찬해 이것을 국법으로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조상숭배가 통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이자 봉제사는 곧 가문의 위세경쟁으로 변한 것이다.
21세기 우리나라는 다종교사회로 바뀌었다. 그런 과정에서 유교는 제천기능을 다른 종교에 넘겨주고 주로 생활의례인 제례로 살아 있다. 명절이라는 축제를 상차림 형식의 의례로 종종걸음 쳐야하는 역사적 배경이다. 하지만 충군효친(忠君孝親) 시대의 규율 수단이었던 봉제사가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는 그런 중압감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사회란 한 시점에서 완성되거나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늘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 추석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때이다. 근원적인 자기성찰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명절은 그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포기하든, 지키고 싶든 이 시점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음 명절은 또 달라지는 것이다. 진정으로 지키고 싶은 가치가 뚜렷하게 부각될수록 조상숭배의 형식은 그만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실용성과 더불어 산업사회의 핵심가치로 떠오른 편의성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은 분별력이다. 실용성·편의성이 만나야 할 무대는 우리들의 평가영역이다. 이를 판단하는 데는 세월이 필요하다.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분별력 발휘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결국 사회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누구나 과거의 방식에 익숙해 있다. 가문의 전통과 정신을 찾는 풍속이나 관행에서는 더욱 집착한다. 그러나 환경이 달라졌는데도 과거 패턴과 똑같이 반응한다면 새 환경에서 그 소중한 가치를 유지하기 어렵다. 위험하다고 가지 않으면 미래세대에 대한 모욕이다. 조상숭배의 형식적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 절차와 횟수가 간결해지고 제사음식 대행업소도 생겨났다. 이런 변화의 시기에 '명절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형식의 변화가 관심사다.
/ 최동성(본지 기획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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