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석대 청식품 대표(76)는 이번 추석에도 쉴 틈이 없었다. 오랜 만에 고향에 내려와 황포묵을 찾는 이들이 쉴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3대 째 전통 방식으로 전주 8미(全州八味) 중 하나인 황포묵을 만들고 있는 장본인. 허영만의 유명 만화'식객'에도 주인공으로 소개됐다. 황포묵은 치자로 물을 들인 녹두묵이다. 전주 우아동 아중저수지 일대에 있는 청식품은 9㎡ 남짓한 조그만 가게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황포묵하면 그를 떠올린다.
군 제대 후 그는 아버지 어깨 너머로 황포묵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러는 사이 50여 년이 흘렀다. 황포묵 하나 제대로 만들겠다고 매일 2~3시간 이상 발 뻗고 자본 일이 없다. 바란 것은 아니나 그리 살다 '황포묵 장인'이란 소리를 듣게 됐으니 이것도 팔자 아닌가. 공들인 것은 이렇듯 헛됨이 없는 법이다.
"황포묵 만든 게 할아버지 때부터니까…. 130년은 된 것 같애. 당시 전주에 5일장이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묵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그런 세월이 수십 년이야. 그걸 아버지가 물려 받았는데,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대신한 거지."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는 그는 아버지가 고집해온 까다로운 제조 과정을 그대로 따랐다. 녹두를 물에 담가 불려 껍질을 벗겨낸 뒤 멧돌에 갈아 앙금을 분리시킨 뒤 이를 가라앉혀 끓이는 과정. 하지만 이 단순해보이는 과정이 하루 반나절 걸린다. 묵을 끓일 때 적정한 온도와 비율을 맞추는 게 관건. 늦어도 새벽 5시30분이면 배달까지 완료된다. 그렇게 정성을 쏟는 덕분에 2~3시간 '쪽잠'자는 데 이골이 났다.
낭창낭창한 황포묵은 전국 유명 비빔밥집에 납품될 정도로 입소문이 났다. 고(故) 이병철 회장이 전주 비빔밥을 즐겨 찾아 서울 신세계백화점까지 황포묵을 댔다.
"원래 녹두로 만든 묵은 청포묵이야. 그런데 전주 8미에 왜 황포묵이 들어갔느냐. 묵이 허여니까 먹음직스럽지 않은 거야. 색소를 넣어야 겠는데, 자연 색소 중에 최고가 치자거든. '동의보감'에 보면 냉을 다스리고, 신진대사에도 좋고, 해독도 된다고 쓰여있다고. 그래서 녹두에 치자를 들인 거지."
하지만 메밀묵, 도토리묵은 알아도 황포묵을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는 "특히나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처음엔 맛이 없다고 하다가 조금만 지나면 좋아하게 된다"고 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황포묵의 수요도 조금씩 늘고 있다는 게 반갑다.
전통을 지켜나가되 소량 생산으로 황포묵의 맥을 이어나갈 것인가, 아니면 잊혀질 위기에 놓인 황포묵을 대량 생산할 것인가. 숙제다. 하지만 작은 것 하나라도 옛 것 그대로 고수하고 싶은 그의 고집은 우직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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