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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정읍 태인

시조·가사문학 탯자리…남도 선비문화 풍류 가득

한 나라의 문화가 독자성을 갖추는 중핵은 그 문화가 고유의 서사성을 갖추고 있는가, 또 그 서사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안정적인 매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다. 그 독자적인 이야기는 시(詩)일 수 있고, 신화(神話)일 수 있으며, 또 다른 창작물일 수도 있다. 우리에겐 고대시가를 비롯, 우리나라 최초의 정형시가 형태의 향가, 고려인들의 삶의 애환을 다룬 고려가요가 있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유교적 이상향을 노래한 시조, 가사 등 훌륭한 문화자산이 있다. 이러한 문화를 접함시킴으로써 우리는 통시적·공시적으로 제한된 세계를 경험하고 세계에 대한 눈을 키우고 자신을 성찰한다. 이 중 선비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시조와 가사문학은 우리민족 정체성의 지표가 되고 삶의 방향성을 일러준다.

정극인의 상춘곡 가사비 ([email protected])

 

▲ 최치원 고향인 정읍 태인은 시가 문학의 탯자리

 

가을바람에 오직 괴로이 읊조리나니,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

무성서원은 신라후기의 학자였던 최치원과 조선 중종 때 관리였던 신잠(申潛)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으로, 교육기능과 제사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다. ([email protected])

창 밖에는 밤 깊도록 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의 마음은 만 리 밖을 내닫네.

 

신라 말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의 오언 절구의 한시(漢詩)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18세에 과거(빈공과)에 급제하고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이름을 떨쳤다. 작품에서 수 만 리 밖의 타국(당나라)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정든 고향(신라)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엿볼 수 있다. 12살의 어린 나이로 먼 이역 땅 중국으로 건너갔던 지은이가 느끼는 향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 그것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지 못한 안타까운 심정으로도 읽힌다. 최치원은 결국 자신의 경륜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끼고 40여 세에 은거의 길을 택했다.

 

최치원이 학문적 기반을 쌓고 풍류를 즐겼던 곳이 바로 정읍 태인이다. 최치원이 이곳 태수를 지내며 유상대를 만들어 선비들과 놀았던 시절부터 정극인이 상춘곡(賞春曲)을 노래하고 고현향약을 지어 태산풍류의 물줄기가 형성되었는데 그 물줄기는 16세기 사림의 시가 문학의 정점에 선 '면앙정가'와 '송강가사'로 이어졌다. 즉 태인은 남도 선비문화가 태어난 탯자리인 셈이다.

 

▲ 맑은 선비의 기품이 흐르는 무성서원

 

정읍 태인(칠보)에 있는 무성서원(武城書院·사적 제166호)은 본래 태산사라는 생사당에서 비롯되었다. 태산 태수를 지낸 최치원이 합천으로 떠나자, 그의 빈자리를 채우고자 고을 선비들이 살아 있는 이를 모시는 생사당을 마련했다. 그 뒤로 정극인, 신잠 등이 선정을 베풀었던 여러 선현들을 모셨다. 태산사가 배움의 전당으로서 모습을 갖춘 것은 1615년, 서원을 세워 배움을 열었고 1696년 숙종으로부터 무성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되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슬 푸른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무성서원이 태산을 멀리 내다보며 고색창연하게 앉아 있다. 옆길에 세워진 홍살문을 지나면 정문 누각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그 담장 앞에는 이 고을 명현들의 송덕비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맨 앞쪽에 대원군 이하응의 형인 이최응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방방곡곡에 1000여 개가 넘는 서원과 사당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47개만 남았는데 전북에서 유일하게 무성서원이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무성서원을 나와 반 마장쯤 걸어가면 최치원이 동진강 상류인 칠보천 물가에 곡수거를 만들고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유상대가 나온다. 나무 그늘에 다소곳이 안긴 정자에 감운정(感雲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고운 최치원을 그리워하여 지은 탓인지 맑은 선비의 기품이 흐른다.

 

'공자의 도로 만물을 교화한다.' 태인 향교(1421년 세종3년) 또한 조선시대의 공립학교로서 선비들의 배움의 장이었다. 조선 개국과 더불어 향교는 국가 정책적 교육 사업으로 마을마다 세워졌다. 유교적 이념에 따른 유교적 인간으로 하루빨리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정면 4칸과 옆면 2칸으로 지어진 만화루(萬化樓)엔 단종의 비 정순왕후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가 이곳 출신임을 알려준다. 넓적한 보도블록이 깔린 길 끝을 돌아 나오면 5칸짜리 명륜당에서 성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긴 지 오래건만 왠지 기자의 귀엔 고졸한 풍모의 선비들이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글 읽는 청아한 소리가 들려온다.

 

▲ 자치규약'고현향악' 만들어 선비들의 삶의 태도 교육

 

왕유는 도연명의 무릉도원을 '도원행'이라는 시에 담아 이상향에 대한 오랜 꿈을 노래했다. 우리에게도 이에 못지않은 이상향을 노래한 시인이 많았다. 전원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가사라는 독특한 양식에 담아서 유교적 이상향을 보여준 정극인 선생(丁克仁·1401~1481)의 상춘곡은 가사문학의 효시로 알려졌다. '상춘곡'을 읊조리다 보면 세속적 진출의 욕구를 뒤로 하고 자연 속에 묻혀서 안빈낙도하는 선비의 고결한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단종 때 사간원정언을 지낸 정극인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치사한 후 처가가 있는 태인으로 내려와 초가삼간을 짓고 은거의 날들을 보냈다. 택호가 '불우헌'이라 함은 세상을 잊고 근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새삼 정극인 선생의 심중을 알 듯하다. 선생은 향리의 젊은이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는 일에 공을 들였다. 이것이 고현향약이 만들어진 시초가 된 셈이다. 무성서원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세로를 따라 은석 마을로 들어가다 보면 마을 뒤쪽에 야트막한 산허리 솔숲에 정극인 선생이 잠들어 있다. 반듯한 비에 적혀있는 '사간원 정언 정 선생'이라는 글자가 초가을 햇살의 입자에 반짝거린다. 타의에 의해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어 좌절할 때 안빈낙도는 또 다른 현실 참여인 셈이었던 것. 그는 고현향약이라는 자치규약을 만들어 이상적 삶을 실천하며, 사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일재 이항 선생이 천하의 영재들과 공부했다고 전해오는 옛 서당 또한 칠보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와 더불어 호남 성리학을 이끌었던 거목으로, 퇴계 이황은 그를 두고 '호남 이학의 문을 연 스승'이라 단언했고 송강 정철은 "호남에 그가 없었다면 미개한 상태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장담했다고 한다. 그의 말 한마디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배움과 실천의 척도가 되었다. 고운 최치원으로부터 시작된 선비문화가 송세림에서 정극인으로부터 구한말 김경흠과 김균과 소고당 여사까지 불세출의 수많은 선비를 내었으니 태인이 선비의 탯자리임이 분명하다.

 

▲ 유교가 갖는 우주적 통찰 되새겨볼 필요 있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교는 무엇이며, 선비란 어떤 존재일까! 조선시대만 해도 유교는 조선의 바탕이념이었고 종교였다. 한때 "공자가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은 몇 마디 말을 가지고 부풀려놓은 허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유교의 이상 사회는 픽션이고 허구다"라며 유교를 한껏 폄하한 이들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명분을 중시하여 호란을 자초하였고 공리공론과 명분에 휘둘려서 결국은 문약(文弱)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지만, 그것이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자리 잡고 사회제도화 된 것은 조선 건국과 함께였다. 유학의 한 갈래인 주자학은 조선 500년은 물론 우리 근현대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다산의 학문을 실학(實學)으로 부르는 순간 유교는 이미 유효 기간의 만기가 선언된 셈이다. 권위와 복종을 인간 사회의 마지막 이데올로기로 착각하고 있는 유교 근본주의자들은 여전히 명령에 익숙하며 입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다. 소통과 인적 네트워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사회에서 유교와 선비문화는 고루하고 봉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고개 끄덕거리게 한다. 그러나 유교를 과학적 검증도, 열린 토론도 거치지 않은 공자의 불완전한 우주론적 에세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것만 아니다. 우주를 담론의 대상으로 했던 도가적 발상이나 우주적 통찰과 철학적 메시지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마을의 화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옛 선비와 같은 어른들이 향음주라도 마시며 음풍농월하는 의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그것이 단지 조선사회를 지탱해온 선비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조선시대 선비 문화는 크고 작은 공동체가 서로 소통하는 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문화가 사회통합을 하는 절대적인 기능을 한 셈이다. 사회의 존립에 정신적 일체감이 요즘처럼 분자화 된 세상에 더욱 더 필요하다. 삶의 면면들이 문화에 투영되고 문화는 바로 정치와 경제의 바탕이 되고 핵심적 가치가 된다. 여러 심성과 규율, 내면과 외면, 개인과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고자 하는 삶을 위한 상징으로서 유교와 선비문화는 여전히 한국인의 핏줄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 같은 불황 시대에 정신적 의지처를 유교 고전의 전아(典雅)한 세계에서 찾아봄이 어떨까?

 

/ 기명숙 문화전문시민기자(시인)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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