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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이길여 박사

행여 환자 놀랄까 ‘가슴에 품은 따뜻한 청진기’

1932년 옥구군 대야면 죽산리‘부농’집안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한학에 밝았던 할아버지는 동학에 관여했으며, 부지런하고 알뜰했던 할머니는 억척스러움으로 재산을 일구어‘10리 안에서는 내 자손들이 남의 땅을 밟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를 실현했다. 손이 귀한 집으로 시집 와 첫 딸을 안긴 어머니는 3년 만에 가진 둘째도 딸을 낳는 바람에 산후 조리는 커녕 미역국 한 그릇도 편히 받지 못했다. 마뜩치 않아하는 할아버지 대신 아버지??嚥?吉女)’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섯 살이 넘어서야 말문이 트였지만 학교에 들어가서는 줄곧 1등을 놓쳐본 적 없는 딸에게 날개를 달아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평등사상이 강했던 그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덕행’의 의미를 가르쳤다. 이리공립여자고등학교에서 제일 공부 잘했던 그는 전쟁 와중인 51년, 서울대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의사의 꿈을 심어준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 결핵퇴치운동을 하면서 교의(校醫)로 활동했던 이영춘 박사다. 의사가 되겠다는 신념은 급성폐렴으로 서른다섯에 세상을 뜬 아버지 때문에 더 확고해졌다. 의대 시절엔 고향에 갈 때 가방 안에 ‘인골’을 가져가서까지 인체 구조를 공부했다. 기름기 묻은 뼈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난리를 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를 감싸 ‘의사 공부’를 하게 해주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친구와 함께 인천??靡봉퓻阪??개업했다. 병원 운영한지 8년 만에 미국 유학을 떠나 선진의료 현장에서 원 없이 경험하고 공부했다. 독신인 그는 생애 딱 한번 청혼을 받았다. 미국 유학 시절이었다. 자상하고 낭만적이었던 교포청년과는 여러 번 데이트를 하기도 했는데 그가 ‘청혼’을 하자 그 순간 마음이 닫혀버렸다. 결혼보다 의사로서의 삶이 우선이었던 그로서는 여지 없는 선택이었다. 귀국해 병원 이름을 ‘이길여 산부인과’로 바꾸었다. 신식 병원건물을 짓고 의료시설도 가장 최신기자재를 들였다. 당시 관행이었던 병원 보증금 규정도 없앴다.‘보증금 없는 병원’은 주위의 염려처럼 진료비를 떼이지도 않고 오히려 번성했다. 앞만 보고 달리던 그는 문득 현실에 너무 안주하고 있다는 회의에 빠졌다. 마흔 세살에 일본 유학을 다시 떠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유학 중 그는 세가지 결심을 했다. 종합병원을 만들고, 의료취약지에 병원을 설립하고 의사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에 힘쓰겠다는 것이었다. 1977년 전 재산을 출연해 의료법인을 세웠다. 오늘의 ‘의료법인 길 의료재단’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결심은 모두 실현되었다. 양평 백령도 철원 등 무의촌 지역에 병원을 열었으며 ‘의료, 교육, 연구’를 하나로 묶는 의과대학을 설립했다.

 

그의 팔십 생애 걸어온 길에는 수많은 활동이 교직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빛나는 절정은 역시 의사로서의 삶이다.

 

환자를 고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그의 철학과 사랑은 ‘따뜻한 청진기’ 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는 청진기를 늘 품속에 넣어두고 진료했다. 긴장한 환자들이 갑자기 들이대는 청진기 금속의 차가움으로 다시 놀라는 것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가슴에 품는 청진기’를 그는 해마다 그가 사랑하는 가천의대 졸업생들에게 선물로 준다. ‘가슴으로 환자를 대하라’. 그가 지켜온 철학이 거기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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