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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상의 정치학

배병삼…영산대 교수

 

삼년상은 유교의 고유한 의례다. 군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사후에는 삼년상을 치렀다. 임금이건 평민이건 사람의 자식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계든, 농사든, 학제든 주로 1년을 단위로 삼는데 부모의 장례는 어째서 3년이어야 할까?

 

사람이 태어나 제 발로 걷고, 제 손으로 숟가락을 뜨기까지 3년간은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유교는 설명한다. 그 동안 부모는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는" 은혜를 베푼다. 이 보살핌은 일방적이기에 절대적이다. 그것을 되갚을 수 있는 기회는 평생토록 없다.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야 그 은혜를 유추하여 되갚는 의례를 재현해 볼 따름이다.

 

즉 태어나서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3년의 경험이 삼년상의 수치적 근거다. 오늘날로 당겨와 해석하자면 삼년상은 부모의 죽음을 기화로, 인간 삶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명상하는 '인문학 페스티벌 기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아가 삼년상에는 더 깊은 뜻이 들어있다. 부모에게조차도 '빚지고는 못 살겠다'는 오연한 자존심 말이다. 부모에게 입은 신세조차 빚으로 여기고, 그 빚은 장례를 통해서라도 되갚고야 말겠다는 '자존심 강한' 인간관이 그 밑에 깔려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부모의 죽음에 삼년상을 치르고서야 제대로 된 사람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통치자의 경우에서 발생한다. 과연 한 나라의 안위를 책임진 국가경영자가 제 부모의 장례 때문에 3년씩이나 공직에서 물러나 있어도 될 것인가? 유교를 표방한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자주 삼년상 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되곤 했다. 특히 국가건설 초창기에는 인재풀이 좁았기에 몇몇 관리들이 삼년상을 치르느라 물러나면 국가경영에 큰 타격을 입곤 했다. 요즘 인기를 끄는 드라마 '뿌리깊은나무'의 주인공인 세종의 처지가 그러했다. 그래서 세종은 한 달을 한 해로 쳐서, 삼년을 석 달로 줄이는 편법을 쓰기도 하였다.(이것을 '단상'이라고 부른다.)

 

지난 주말, 북한의 통치자 김정일이 죽었다. 그 아버지 김일성의 사후에 '유훈통치'라는 이름으로 삼년상을 치르더니, 그의 아들 김정은도 삼년상을 치를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북한이 유교국가일 수는 없다. 다만 북한의 문화에 삼년상을 미풍양속으로 보는 전통적 습속이 남아있는 증거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미 서구화된 우리들 눈에 삼년상은 퇴영적이고 우스꽝스런 짓으로 보이겠지만, 북한은 여태 서구문화를 직접 체험하지 않은 곳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그만큼 전통문화와 습속, 그리고 생각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삼년상은 정치적 측면에서도 유용한 제도다. 혈연으로 정통성이 계승되는 왕조의 경우 더욱 그렇다. 우선 삼년상은 후계자가 막후에서 통치자 훈련을 받는 수습과정으로 활용할 수 있다. 후계자는 효성스러운 상주로 숨으면서 초창기에 빈번히 발생할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삼년상은 전통을 계승하고, 과거의 폐단은 혁신하는 개혁정치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공자가 "3년간 아버지의 정치방식을 고치지 않아야 효자라고 이를 수 있으리라."고 말했던 것은 전통의 계승적 측면을 유념한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전문가들을 기용하는 집단지도체제를 운영함으로써 향후 인재풀을 확장할 수 있다.

 

이모저모 삼년상이라는 제도가 정치적으로 유용할 순 있지만, 그러나 이미 과거의 풍속일 따름이다. 조선시대라면 군주의 삼년상은 정쟁을 3년간 휴전시키는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삼년상은 그런 정치적, 문화적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특히 북한의 경제사정은 통치자가 3년 동안 막후에서 책임을 비켜나있을 만큼 한가롭지 않다.

 

객관적으로 볼 때, 북한은 머지않아 큰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인민들의 경제적 삶이 윤택한 상황이라면 삼년상이라는 효행이 정치적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기아상태에서는 도리어 사치스런 짓거리로 폄하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맹자가 누누이 지적했듯, '유항산, 유항심'(有恒産, 有恒心)이라, 인민들의 경제적 삶이 여유로워야 충성심도 영속적일 수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진리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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