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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기 서울대 부총장 "의사는 보편적 인류애와 책임감·탐구의식 가져야"

▲ 임정기 서울대 부총장이 "의사는 상처받기 쉬운 환자를 대하는 직업인 만큼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올바른 인성이 더 엄격하게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서울대로 가는 셔틀버스는 만원이었다. 1월 하순의 매서운 추위에다 겨울방학이 겹쳐 한가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학본부 앞에서 내린 학생들은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학생회관 식당이며 중앙도서관은 꽤 붐볐다. 잠시 들른 학생회관 벽면에'누가 조국의 길을 묻거든/ 머리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싯귀가 있었다.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에 부응하듯 한 겨울에도 서울대는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관악산 정상에서 힘차게 달려온 용맥의 기가 뻗혀있는 대학본부. 그곳 4층 집무실에서 임정기 연구부총장(62)을 만났다. 당초 한달여 전, 의대가 있는 연건캠퍼스 학장실에서 만나기로 했었으나 부총장으로 발령나는 바람에 이곳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진 것이다.

 

 

- 우선 축하드립니다. 서울대의 연구분야를 총괄하는 자리로 옮기셨는데 눈코뜰새 없이 바쁘실 듯합니다. 어떠신가요?

 

"의대는 40년 동안 재직해서 익숙한 곳인데, 이번에 새로 직무를 맡게돼 분주한 일정을 보내고 있습니다.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도 새로 출범했구요."(서울대는 2011년 12월 28일자로 국립대학법인으로 재출범했다.)

 

 

- 연구부총장은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가요?

 

"2009년 이전까지는 단일 부총장 체제였습니다만, 동년 8월에 특임 부총장제를 신설하여 대학원장과 겸임하도록 했습니다. 2010년 8월 현 오연천 총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교육부총장과 연구부총장의 양축으로 개편했습니다. 연구부총장의 역할은 연구처(산학협력단 포함), 기획처, 사무국, 시설관리국 및 정보화본부의 업무를 총괄합니다."

 

 

- 서울대는 2008년 국제학술지(SCI) 논문발표 건수에서 세계 20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006년 32위, 2007년 24위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직무상 더 채찍을 가해야 할텐데요?

 

"창의적 연구의 결과로 얻어지는 논문 발표는 교수님들의 존재 이유이자 성취감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대학의 역할은 교수와 대학원생을 포함한 연구원들이 연구에 매진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학문분야간 소통을 통한 융합적 연구환경 조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이에 대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대학에서는 잘하는 연구팀에 더욱 지원을 하고 어려운 연구 여건에 있는 교수님들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이룩한 업적을 대학구성원과 공유하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이제는 양적 성장을 접고 질적 성장에 주력할 때라는 목소리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서울대의 연구 업적을 양적 기준으로 보면 세계 어느 대학도 유래가 없는 가파른 성장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장 추세로 간다면 동양의 최고이자 세계 2위인 동경대학에 5년 이내에 접근하리라 예상합니다. 이미 의학분야는 2009년을 기점으로 동경대학을 추월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양적 기준이며, 피인용 횟수로 대변되는 질적 기준은 훨씬 못 미칩니다. 서울대에 아직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는 현실이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적 성장은 질적인 성장과 상충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학문의 발전이 가치있는 이정표적 논문을 중심으로 전개돼 온 역사를 볼 때 연구업적의 질적 향상이 향후 글로벌 중심대학을 목표로 하는 서울대의 가야할 길임은 분명합니다."

 

 

- 그럼 이제 부총장님이 몸바쳐 온 의학교육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우선 서울대 의대는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인데 어떤 학생들이 오고, 어떤 교육을 시키는지 소개해 주시죠.

 

"학업능력은 모두 뛰어난 학생들입니다만 성품이나 사회 적응력 등은 학생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학생은 뛰어난 적응력으로 잘 헤쳐 나가는가 하면, 어떤 학생은 세심하여 쉽게 상처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학생들은 순수하여 학교의 교육 목표에 잘 순응하고 있습니다. 의과대학생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지식과 술기(skill)는 실로 많습니다. 지식의 습득은 강의와 실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만 되도록 주입식이 아닌 자기 주도적 학습을 늘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 의사나 의학자로서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하게 꼽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학문분야에서 공통된 사항이겠습니다만, 특히 의학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학문이므로 보편적 인류애를 갖춘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어서 책임감과 탐구의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 부총장님이 의대를 지망한 동기가 궁금합니다.

 

"제 둘째 형님이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고 계신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진로를 결정할 때 형님의 모습을 보고 '의사로서의 길이 보람이 있겠다'고 생각해 결정했습니다."

 

 

- 영상의학을 전공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제가 전공과목을 정할 때는 영상의학(당시에는 방사선과학)이 그다지 인기있는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4학년 선택의학 실습기간 중 방사선과의 활기찬 학문적 분위기와 당시 미국 교환교수 연수를 갓 마치고 귀국해 조교수로서 종회무진하시던 한만청 교수님의 활동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한 교수님께서는 방사선과 의사는 '진료의 방향을 결정하여 주어야 하는 의사의 의사'이므로 광범위한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 부총장님은 교육은 물론 연구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보였습니다. 국제학술지(SCI)에 많은 논문을 발표하셨고, 대한의학회 등 각종 학회의 연구분야를 앞장서 이끄셨습니다.

 

"제가 국제학술지에 처음 논문을 게재한 것은 전임강사 시절인 1985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영문도 서툴기 짝이 없고 논문작성에 대한 공부를 따로 한 것도 아닌데 처음 보낸 원고가 채택되니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가슴이 뛰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게재된 논문이 증가하면서 국제학술대회에서 일면식도 없는 유명 학자들이 제 이름을 알아보는 데에 놀랐습니다. 그 이후로 교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기쁨은 귄위있는 학술지에 투고한 논문이 채택되었다는 편지를 받는 순간들이었습니다."

 

 

- 부총장님은 의대학장 재직시 의학전문대학원 폐지에 앞장섰습니다. 왜 반대했습니까?

 

"의학전문대학원 도입의 외형상 취지는 의학교육의 질적 향상이었으나, 실제적인 취지는 대학입시 경쟁 과열해소였습니다. 그러나 의학교육의 일선에 있는 깨어있는 교수들의 대다수는 의전원의 도입이 교육의 질적 향상은 물론 입시과열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대한 역기능이 올 것을 예측했기 때문에 반대한 것입니다. 실제로 대학입시 과열은 해소되지 않은 반면, 자연대 공대 등 대학재학생을 중심으로 새로운 입시 경쟁이 과열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이공계 교육의 황폐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현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각 대학의 자율적 판단에 따른 선택을 하도록 방침을 정한 것입니다."

 

 

- 의대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말씀을 들려주시죠.

 

"의학이라는 학문은 인류가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향상된 삶의 질을 유지시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에서 의사 혹은 의학자에게 거는 기대는 막중하며, 그에 부과되는 사회적 책임 또한 엄중합니다. 직업의 경제적 안정성이 주어지는 대신에, 전문직업인으로서 지식과 술기를 쌓고 유지하기 위해 평생 연마해야 하고, 양심과 인류애를 바탕으로 진료와 연구에 임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국제기구의 수장직을 맡아 열정적으로 세계의 질병퇴치를 위해 헌신하다 순직한, 고 이종욱 WHO 사무총장이 재임 중 의과대학생을 위한 특강에서 "의사는 먹고 살만한 수입이 주어진다. 돈 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 전국적으로 의대 열풍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성적 최상위급 학생의 의대 편중현상은 심화되어 가고 있으며, 이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학업능력이 있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학생이 의사가 돼야겠지만, 지금과 같이 최상위권 학생들이 전국의 의과대학/의전원에 입학하는 현실은 국가적으로 볼 때 균형있는 학문적 발전에 적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거나 완화하는데 고교, 대학, 학부형들이 주체적으로 실효적 역할을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근본적으로, 우수한 학생이 이공계로 진학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학업을 마친 후 학자로서, 기술자로서 전공을 살려 갈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의 제도적 지원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런 후에 고교에서 진학지도, 대학에서는 경쟁력있는 교육 및 역할모델 교수의 역할, 그리고 학부형의 의식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존경하는 의학자는 누구를 꼽을 수 있습니까?

 

"1956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포르스만(Werner Forssman)박사입니다. 이 분은 독일 베를린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외과 전공의로 근무하던 1928년, 자신의 팔 정맥에 고무관을 삽입해 그 끝이 우심방에 이르게 한 후 조영제를 주입하여 심장과 대혈관의 모양을 영상화하는 당시에는 혁신적이고 매우 무모한 시술을 했습니다. 이를 뿌리로 오늘날의 심장 카테터술로 발전하여 많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Dr. Forssman이 이같은 무모한 실험을 지속하자, 소속된 외과학 교실에서 배척되어 외과의사로서의 길을 접고 스위스에서 일반의로 한가하게 지내던 중인 1956년, 28년 전의 업적으로 노벨수상자로 선정되었음을 통보받게 됩니다. 이를 통해 배울 점은 창의적이고 자기희생적 연구가 인류의 질병 치료에 큰 공헌을 할 수 있고, 이러한 업적은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지난 해 서울시장 선거때부터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우리 사회 리더십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런'안철수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 얘기는 안하는 게 좋겠습니다.(웃음)"(안 원장과 부인 김미경 서울의대 교수는 각각 80, 81학번으로 임 부총장의 제자다. 임 부총장은 안 원장이 차분하면서도 모범적인 학생이어서 눈에 잘 안띠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2009년 의대 졸업식때 처음으로 안 교수를 초빙, 연설을 부탁했다. 그 때 안 교수는 학생들에게 T자형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넓히고(ㅡ), 그중 특정분야를 깊게(ㅣ) 하라는 내용이다.)

 

 

- 이제 고향얘기 좀 해 보죠. 김제에는 자주 다녀오십니까?

 

"선산이 금평 저수지 부근에 있어서 봄·가을에 형제들과 함께 찾아갑니다."

 

 

- 고향에 대한 어릴 적 추억 한 두가지만 들려주시죠.

 

"성덕면 묘라리 농가인 우리집에서 성동초등학교까지 1.5 km 정도 되었습니다. 동네가 임(任)씨의 집성촌으로 당시 상급학년이던 친척 형의 집에서 7-8명이 모여 열을 지어 행진곡을 부르며 등교했습니다. 그러나 봄철이 되면 얼었던 대지가 녹으면서 아지랑이 너머 드넓은 논에 소들이 논갈이를 하던 아늑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등굣길의 추억이 있습니다. 또 태어난 집의 남쪽으로 부분적으로 지평선이 보이고 그 지평선을 가르는 연한 푸른색의 높지 않은 산이 보였는데, 나중에 가수 박재란의 노래로 듣게 된'산너머 남촌에는'이란 곡의 가사가 제가 당시 느낀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헌 국회의원으로 활동을 하셨던 외숙(조한백 의원)의 선거운동용 지프차를 타고 농촌을 따라 다닌 기억도 납니다."

 

 

- 전북에서는 무조건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올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역의 의료와 의학교육에 조언을 주신다면?

 

"최근에는 전국적으로 의과대학 학생의 학업 역량, 지역 거점병원의 의료 역량이 평준화돼 수도권과 전북지역 간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결과는 우수한 학생이 전북의 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이어 모교에서 수련 및 교원으로서의 길을 걸으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근래 의전원 체제가 도입되면서 수도권 대학졸업생이 지역 의전원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는 수도권으로 다시 복귀하면서 지역 의료인 양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탈 현상은 의전원을 통한 입학 체제가 종료되는 2014년 이후에는 완화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 고향의 자라나는 후학들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김제중앙초등학교 6학년 같은 반 동급생 중에 저를 포함해 3명이 서울대에 진학했습니다. 언론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두 친구는 학창시절 주위의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꿈꾸고 있는 미래의 모습에 가까이 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정치가였던 앙드레 말로의'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말을 실현한 것입니다. 앞날에 대한 꿈과 희망이 강하고 구체적일수록 현실에서 다가오는 역경을 극복하기 위한 힘은 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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