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4·4운동을 세상에 알리고 그 뜻을 널리 펴는 일은 나에게는 일종의 신앙입니다. 4·19혁명, 5·18운동, 6·10민주항쟁 등 자유와 민주 수호 운동에는 언제나 학생이 선두에 섰습니다. 청년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미래 짊어질 역군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 전북대 4·4운동을 주도한 전대열 씨(72·4·19혁명 공로자회 총무국장·사진)은 5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뜨거운 심장을 간직하고 있었다.
올해로 4·19혁명이 일어난지 52년이 됐다. 1960년 당시 이승만 정권은 불법 개헌을 통한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자행했고, 이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은 4월 19일 총 궐기해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4월 4일 전북대 캠퍼스에서 전국 최초로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700여명의 전북대학생들은 독재 정치 타도와 3· 15 부정선거 재선거를 요구,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그 중심에 전 씨가 있었다.
"때마침 4월 4일은 전북대 개강일이었습니다. 정치과 학생이라면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 청년학도들은 시시각각으로 전해지는 자유당의 부정을 목격하며 분노에 떨었습니다"
전 씨는 개강을 앞두고 평소 뜻이 맞았던 학생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나라에 대한 민을 털어 놓았고, 의기투합한 젊은이들의 고뇌는 행동력으로 표출됐다. 이에 원용인·허영삼·박용호·황비룡 등 정치과 2학년생과 평소 친하게 지내는 학생들도 적극 호응했다.
"우리는 전주시민들에게 우리 뜻을 알리기 위해 스크럼을 한 채 교문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교문은 닫혀있고 경찰 수백 명이 우리 앞을 막아 섰습니다. 할 수 없이 교내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재선거를 요구를 했습니다. 다음날 신문을 보니 모든 중앙지들은 침묵을 지켰고 다만 전북일보만이 사회면에'전북대 데모미수'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습니다"
이 사건으로 전 씨 등 주도자들은 전주경찰서로 연행, 당시 고형곤 전북대 총장(고건 전 총리 부친)의 보증으로 학교로 복귀할 수 있었다. 전 씨는 대학 졸업 후 기자로 활동하며 반유신 운동에 참여한 일로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다섯 차례, 전두환 정권 때 한 차례 투옥되는 모두 9년 8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52년 전 그날 우리 청년들은 자유와 민주라는 기본권을 지켜내기 위해 총탄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요즘 청년들은 정치에 대한 신념이 부족해 보입니다. 청년들은 언제라도 독재와 부정 그리고 부패에 과감히 저항할 수 있는 정신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높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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