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치·정감 넘치고 한국 여성 특유 인고의 성정 풍만
현재 매창의 삶에 대한 기록은 그의 시집 『매창집』과 발문, 그리고 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발문이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중기 여류시인이었던 매창의 본명은 향금, 자는 선향이며, 매창은 그의 호다. 『매창집』은 2권 1책. 목판본으로 1668년 12월에 부안현의 아전들이 전송하던 매창의 한시 수백수 중에 각체 58수를 모아 변산 개암사에서 개간하였다.
이 시집 속에 수록된 이계생의 한시를 각체별로 보면 오언절구 20수, 칠언절구 28수, 오언율시 6수, 칠언율시 4수 등 58수 등이며 말미에 발문, 즉 간기가 부록되어 있다. 매창의 한시는 재치 있고 정감이 넘치면서 한국적 여성 특유의 인고의 성정이 풍만한 작품으로 회자된다.
가곡원류에도 매창의 대표작인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으로 시작되는 작품이 소개돼 있다. 매창은 가무는 물론 현금에도 능해 다재다능한 예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연유로 기생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인지 알려주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문학가 허미자는 그를 서녀로 보아 출신성분상 자연스럽게 기생이 되었다고 하는 반면, 문학평론가 김지용은 고을 태수인 서진사가 권력으로 매창의 정조를 빼앗았으며, 그를 따라 서울로 갔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안으로 내려온 후 기생이 되었다고 말한다.
두 가지의 추측을 모두 종합해 볼 때 매창은 어떤 이유로든 양반가와 혼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생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문학작품 곳곳에 기생 신분에 대한 부끄러움과 한탄이 배어있는 것도 바로 이에 기인한 것이다.
특히 그의 작품은 기생임에도 불구하고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우수한 시재를 엿볼 수 있다.
매창이 죽은 뒤 45년만인 1655년 그의 무덤 앞에는 비석이 세워졌다. 그 뒤 300년의 세월이 흘러 비석의 글자들이 이지러진 관계로 1917년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에서 비석을 다시 세웠다.
더욱이 부풍시사에서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에는 자손이 없는 매창을 위해 남사당이나 가극단, 협률사 등이 들어올 때에도 읍내에서 공연을 하기 전에 반드시 매창의 무덤을 찾아와서 한바탕 굿판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매창은 기녀라는 최하위 신분에도 당대는 물론 후학들에게도 생애나 예술세계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여류예술가이다.
현재 부안서림공원에 시비도 세워져 있어 이매창을 기리고 있다. 매창의 예술적 영혼과 치열한 시대정신은 신분을 초월해 전북 예술의 화두임을 보여준다.
/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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