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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전쟁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6·25 참전 명패 받은 신흥중 21회 졸업생 이천수 씨 / 19살 낙동강 전선 투입…고향 생각에 서러움도 / 전쟁터서 소중한 생명 죽였다는 깊은 자책감도

"강가에 비친 달빛을 보면서 고향생각 정말 많이 했었죠."

 

지난 1950년 신흥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천수씨(82·신흥중 21회). 19일 6·25 참전용사 명패를 받은 그는 6·25전쟁이 나자 24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전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62년의 세월이 흐른 19일 다시 교정에 모인 동료들은 11명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전우를 만난 이씨의 감회는 남달랐다.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그는 "그때(당시 19세)는 철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이었죠. 친구들과 후배들은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신념밖에 없었고 그대로 전장으로 향했습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가운데 그의 동료들 또한 죽음의 그림자를 빗겨 갈 수 없었다.

 

"하루에도 수 십 명씩 동료들이 죽어갔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살기 위해 적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죠."

 

낙동강 전선에서 살아남은 그는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정처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힘들고 고독한 여정이었지만 남은 동료들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고단함을 잊곤 했다.

 

"이북도 우리나라 땅하고 다를 게 없었어요. 강, 산, 바다 모두 눈에 익숙해 고향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전장에서 마주한 중공군은 이씨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기름을 부었다.

 

중공군들이 국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밤만 되면 슬픈 음악을 연주했던 것. 이 전술은 의외로 잘 먹혀들어갔다고 한다.

 

이씨는 "중공군이 부는 피리소리에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일단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 잡았지요. 그런데 강가에 비친 달을 보니 서러운 마음이 북받쳐 왔어요"라고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목사가 된 그에게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된 모습보다 더 힘든 것은 소중한 생명을 죽였다는 자책감이다.

 

그는 "전쟁 중에는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못했어요. 하지만 동료가 죽고 상대방이 죽었을 때는 마음이 너무 아팠지요. 다 가정에서는 소중한 자녀들이고 아들들인데…"라며 서글픈 심정을 전했다.

 

이어 "이런 비참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과거의 역사를 똑똑히 기억해야 하고 전쟁을 미리 막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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