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 황적 바라 생황 연주 사실적 표현
신중에 관한 기록은『삼국유사』에서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화장사에서 밤마다 화엄신중을 외웠다는 기록과, 문수갑사에서 복전 7원이 밤낮으로 늘 화엄신중 예참을 행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늦어도 8세기 초에는 화엄신중에 대한 신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으면서 일반 서민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짐에 따라 현실적인 불안 심리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내세적인 신앙보다는 병마나 재액의 퇴치와 현세의 복락을 기원하는 현세구복적인 신앙이 확대되었다.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의 신중탱은 제석과 범천, 천룡팔부중을 함께 묘사한 제석·범천·천룡탱화에 속한다. 이 형식은 신중탱의 형식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애용되었던 것으로, 현존하는 작품 중 가장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신중탱은 범천, 제석천, 위태천 같은 주요 존상 외에도 팔부신중과 토속신이 그려진다. 오늘날 사찰에 가보면 신중단이 빠짐없이 설치되어 있다. 이를 보더라도 19세기에 신중신앙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중은 불법이나 가람의 수호자라는 외적인 성격과 벽사, 소재라는 내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주는 신으로, 안으로는 질병을 없애주고 복을 내려주는 신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신앙되고 있다.
특히 이 신중탱에는 당대 국악문화도 살필 수 있는 악기가 등장한다. 마치 선녀처럼 생긴 여인들이 비파, 횡적, 바라, 생황을 극사실주의적으로 표현했다. 마치 오늘날 연주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국악은 당대 진솔한 마음을 담았던 그릇과 같이 현실적인 모습을 반추시킨다. 고요한 절에서 소망을 담으며 악기로 마음을 풀어낸 선조들의 슬기가 화공의 빼어난 솜씨로 탄생된 것이다.
더욱이 옆으로 긴 화면 상단의 중앙에는 보살형태의 제석과 범천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녹색두광에 금색신광을 지고 있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상이 채워져 있어 국악사는 물론 회화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1896년 제작된 이 작품은 가로 223.6센티미터, 세로 141.5센티미터 등 규모면에서도 장중함을 보여준다, 견본채색으로 그림을 그린 원해당 용준, 편수출초 정련 등 6명의 화공은 그림에서 하나가 됐다. 그림으로 빚어낸 악기가 음악과 아름답게 동행하고 있다.
/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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