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고뇌는 삶의 질서를 재탄생 시키고 삶의 질서를 새로 세우게 하는 철학을 탄생 시킨다. 고민은 개인 적인 것에 가깝고 고뇌는 사회에 눈뜨는 고통의 시작이다. 아니다. 두 개의 낱말이 입장과 해석이 바뀌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개념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논리이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따져 보자면 지극히 사적 경험의 소산이다. 고민과 고뇌의 두 낱말의 개념이든 그 어떤 논리든 내가 없으면 세상이 없으니까.
모든 말의 개념은 실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개인적인 논리가 사회적인 해석의 논리로 전이 되고 확대 되는 것이 건강한 자기 확인과 확신 그리고 신념이니까. 존재란 어디에서 뚝 떨어진 세상의 점 하나 같은 내가 아닌가. 세상과 처음 대면하고 세상과 처음 직면하는 시초란, 시작이란 그래서 탄생이고 그리하여 절정이고 장엄이다. 고뇌, 고민, 번민이야 말로 모든 것들로부터 가해지는 아픔이고 기쁨이며 환희요 동시에 절망이다. 새벽이며 동시에 저물녘이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는 영원의 시작이다. 정치도 예술도 사랑도 결혼도 아니, 그 모든 시작은 고민이다. 고민은 상대가 있음으로 정직함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정직함이란 삿됨이 없는 맑은 자기 투혼과 갱생의 소산이다. 정직함에는 나를 위한 이해타산적인 계산이 들어 갈 틈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는 막강한 존재의 의미다. 고민, 고뇌, 번민은 결국 해결될 사안임을 전재로 모든 존재의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꿈꾼다.
존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 날수 없는 인간의 고민 고뇌 번민은 그래서 예술을 꿈꾼다. 모든 삶이 그렇듯 '고통이 아름다울'때 예술이다. 존재란 내가 있다는 말이고 동시에 상대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상대를 부정하는 것은 고민을 포기 하는 것이다. 고민의 근거인 내가 기대고 있는 저 쪽을 부정하는 공허함을 나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확인한다. 한국사회의 경직된 흑백논리와 돌아 앉아 외면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식민지적 유산과 분단. 그리고 상식에서 벗어난 뒤틀린 정치권력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모든 사회 구석구석에 지금도 부지런히 뿌리를 뻗는 중이다. 작금의 보수와 진보적 개념은 모두 보수다. 보수는 나만 상대하고 다른 것은 대상으로 간주한다.
더울 때 나의 정신은 강화되고 긴장한다. 몇 곳의 그림전시장을 찾아다녔다. 화가가 불러들인 그림 속의 사물들이 아무 긴장 없이 서로 무덤덤하게 외면하고 있는 고민 없는 그림들이 눈에 뜨였다. 그림에서 고민이 없다는 고민만큼 큰 고민은 없다. 고민 없으면 조화를 꿈꾸는 갈등이 없으니, 감동의 근원인 생명력이 없다. 시가 그러하듯이 그림이 말이 되면 안 된다. 그림이 말이 될 때 물감들이 만들어낸 사물들이 서로 무관하다. 즉 내용이 없다는 말이다. 손끝에서 놀아 난 고민 없는 유희는 반성 없는 일방적 통증을 준다.
세계적인 보편성과 객관성을 얻는다는 것은, 진정한 자기 얼굴을 찾아 헤매는 일이다. 철학의 빈곤이 가져온 너무나 빈한한 그림들이, 자연을 베낀 영혼 없는 그림들이 벽에 맥없이 걸려 있다. 오랜 가뭄 끝에 쏟아지는 빗줄기들은 만물을 소생시킨다. 마른 땅에 떨어져 튀어 오르는 저 활기찬 빗줄기들의 하얀 발 뒷굼치들, 다만 숨이 차다. 긴장의 숨찬 아름다움, 숨을 몰아서 쉬게 하는 소낙비 같은 그림은 어디서 탄생 하는가.
도립 미술관에서 장호의 그림을 만났다. 살이 없는 뼈아픈 지리산을 처음 보았다. 뼈를 깎고 피를 말린다는 예술가들의 말은 자기도 믿지 않은 자기 엄살이 절반이고 나머지는 독자를 향한 엄포가 대부분이다. 뼈는, 피는 현실에서의 고통이지, 말이 아니다. 말로 그림을 그리고 말로 시를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살 땅기는 긴장에 몰입하라. 덥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이 폭염은 당연한 자연 현상이다. 현실에 응하라. 현실은 피할 수 없으니,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무섭지 아니한가?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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