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은 '소리의 고장'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창은 판소리의 고장이다. 그 이유는 많은 명창이 배출됐고, 이 소리를 즐겼던 귀명창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 추가한다면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가 있다.
고창읍성 바로 앞에는 판소리에 심취한 후원자이자, 판소리 사설의 집성자이며, 이론가이자 비평가로 이름을 날렸던 신재효의 복원된 고택이 있다. 중인 출신으로 평생을 고작 아전에 머물렀지만 그는 40대 초반에 곡식 1000석을 추수하고 50여 가구가 넘는 세대를 거느렸던 대부호였다. 그는 투춘나무로 무지개 문을 만들고, 포도시렁을 얹어서 거들먹거리는 양반네들도 누구나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도록 했다. 그만큼 판소리를 당대 최고의 문화로 올려놓은 것이다.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으로 중요민속자료 제39호인 신재효 고택은 판소리를 집대성한 국악의 개척자 신재효의 산실이자 판소리 교육공간이다. 그가 여생을 마치던 1884년(고종 21)까지 기거하였던 동리정사(桐里精舍)는 185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아들이 1899년에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안채를 포함한 크고 작은 여러 채의 건물들이 한 곽(廓)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조촐한 초가지붕인 사랑채만 남아 있다.
이 건물은 국권상실 이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고창경찰서의 관사로 이용되었다. 이때 지붕이 함석으로 개조되고 이용에 편리하도록 건물의 구조가 개조되거나 첨삭되었다고 마을의 노인들이 증언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국가에서 옛 모습을 되찾고자 개조된 부분을 상당히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초가지붕인 정면 6칸, 측면 2칸의 一자형이며,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집 뒤편에는 원래 연못이 있었으나 메워지고 그 자리에 고창경찰서가 들어섰으며, 앞쪽에는 비교적 큰 두 그루의 나무가 있는 정원이 펼쳐져 있다. 또, 건물 오른쪽에는 네모꼴의 연못이 있고 왼쪽 뒤편에는 우물이 남아 있다.
평면구성은 건물의 왼쪽으로부터 부엌 1칸, 온돌방 2칸, 대청 1칸, 온돌방 2칸통으로 되어 있고, 부엌을 제외한 전면 5칸은 우물마루로 꾸민 반 칸 너비의 퇴로 연결된다. 이 건물은 부엌 벽을 심벽으로 처리하고 부엌과 온돌방 사이의 개구부에 비교적 너비가 넓은 쌍여닫이 출입문을 설치한 것이 특이하며, 대청의 양쪽 벽에 방과 연결되는 출입문을 내지 않은 것이 이채롭다.
신재효의 삶을 더듬어보면 집터 곁의 판소리 박물관에 상세하게 설명된 그의 업적보다는, 첫 여류명창인 진채선과 얽힌 드라마틱한 사랑이야기에 더 끌린다. 당대의 권력자에게 연인을 빼앗기고 '도리화가'란 간절한 그리움의 노래를 지어 불렀던 신재효도 그렇지만, 김제 어디쯤의 절집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지는 진채선의 기구한 삶도 안쓰럽고도 애틋하다. 하전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진 심원면 검당포의 작은 마을 안쪽에 있었다는 진채선 생가는 지금은 자취도 없고, 그저 초라한 팻말 하나만 그가 태어난 곳임을 알리고 서있었다. 그렇지만 신재효 고택은 판소리 사설의 집대성, 최초의 여류명창 배출, 그리고 수많은 명창을 길러낸 산실로 오늘도 그 빛은 한여름 태양빛도 강렬하다.
/전북도문화재 전문위원·한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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