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폐기하기로 한다. 책을 신앙처럼 생각하며 안개 자욱한 길 없는 길에서 얼마나 헤맸던가.
책 속에서 인생의 빛나는 순간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새벽별처럼 가뭇없이 사라져간다. 이제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이 한낱 문자 기호의 배열일 뿐이었음을 뒤늦게 고백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이유는 마지막 페이지를 다 덮지 못한 탓이다. 정민 선생의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 2011)을 읽어가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다.
다산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운명적인 만남을 그려내고 있는 이 책의 첫 마디는 '과골삼천'(과 骨三穿). 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씩이나 뚫릴 정도로 치열했던 공부의 자세를 보여주는 다산 선생과 그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황상의 일화는 절창이다. 두 사람의 만남이 아름다워서 절창이기도 하지만, 가슴에 오래 새겨두고 곱씹을 만해서 절창이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런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황상의 말은 스승과 제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가르침의 미덕이 자본화된 요즘 더욱 사무친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현상도 그렇지만 남 탓, 세태 탓으로 모든 허물을 덮으려는 곡해의 자세가 부끄럽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잠깐 등 돌린다고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애써 부정한다고 그 인연을 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멀고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거칠기만 하다. 짧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오로지 책 속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우매한 행태의 반복 탓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잠깐 책을 덮고자 한다. 애초에 책은 스승을 향해 가는 길, 제자를 찾아 떠나는 여정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책 속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자체가 길이라는 뜻이다. 그 관계의 지향성을 무시한 채 책 속만 들여다보았으니 아무래도 소견이 좁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소견은 좁을지라도 과골삼천의 자세마저 버려서야 쓰겠는가!
모두 마흔네 개의 마디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마흔한 번째 마디에는 황상이 쓴 '회주 삼로에게 드림'의 한 대목이 있다.
"종유했던 여러 분이 차례로 세상을 뜨매, 비유컨대 다락에 올라갔는데 사다리가 치워지고, 산에 들어가자 다리가 끊어진 격이라 하겠습니다."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들이 세상을 뜬 후 어지러운 소회가 잘 드러나 있다. 이 구절에서 비유하고 있는 '사다리'와 '다리'는 책으로 읽힌다. 비약적 읽기가 허락한다면, 나는 이 구절을 이렇게 읽어보고 싶다.
"책을 덮어야 길을 얻을 수 있다."
가르침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제자에게 길을 보여주고는 곧 그 길을 지워버리는 것. 길이 끝나야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깨달음의 기회를 주는 것. 애초에 스승의 길은 옛길이었으니, 그 길을 지나 제자는 마땅히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것이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어지는 공부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책은 잘못이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책 속에 길이 있을 거라고 순박하게 믿었던 독법이 문제다.
책은 다만 책이고자 했을 뿐, 애초에 빛나는 길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책은 오히려 무수한 오독의 발자국으로 어지럽혀진 진흙탕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서 아직 밟아보지 않은 처녀지를 찾고자 했던 어눌한 책읽기를 탓할 뿐이다.
그래도 깨우친 것이 있다면, 길은 책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산 선생이 보여주고 싶었던 가르침의 순간이자 황상이 깨달았던 배움의 극치이리라. 그러므로 이제 '삶을 바꾼 만남'을 버리고자 한다. 책을 버리는 순간 비로소 스승을 얻게 될 것이니, 책 속의 길이 아니라 그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한다. 손에서 책을 높고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디디며 다가올 '운명'의 순간을 기다려본다.
※ 문신 시인은 2004년 전북일보,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집 '물가죽북'을 펴냈다. 현재 전주문화재단에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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