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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금강경판 ·금동불입상 함께 출토…10세기 초 후백제 때 봉안

 

1960년대 전주에서 논산으로 가는 국도 1호변에 자리한 낮은 언덕.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그 언덕에는 북쪽으로 기운 석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는 어엿한 국보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의 옛 모습이다. 그렇게 기울어 있던 석탑은 1965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있었던 석탑 중수를 통해 오늘날의 번듯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중수하던 중 1층 지붕돌 윗면과 심초석에서 국립전주박물관을 대표하는 전시품이자 우리 고장의 자랑거리인 금강경판과 함, 금제 사리함과 수정병 등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왕궁리 5층석탑은 흔히 불국사 석가탑과 같은 통일신라 석탑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처럼 백제 석탑을 연상시킨다. 이 때문에 석탑을 삼국시대 백제에서 조성하였을 것이라는 견해, 통일신라 초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견해, 이와 달리 나말여초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견해 등 다양하게 의견이 제기되었다. 언뜻 보기에 백제 석탑과 같아 보이지만, 이 기단부는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한 문경, 봉화 등 경북 북부지역 석탑과 유사하다. 이는 왕궁리 오층석탑을 조성할 때 경북 북부지역 석탑의 기단을 모방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멀고 먼 경북 북부지역의 석탑을 따라했을까. 주지하다시피 문경은 후백제 견훤의 고향이다. 왕궁리 5층석탑 조성 시 견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900년 완산주에 이르러 백제 의자왕의 숙분을 씻겠다고 공언한 견훤이 백제의 또 다른 도읍이었던 '왕궁평'에 세운 기념비적 조형물이 바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아니었을까.

 

이곳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와 금강경판 역시 석탑과 마찬가지로 그 조성시기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다. 특히 최근 미륵사지 석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뒤에는 삼국시대 백제에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왕궁리 5층석탑에서 발견된 금강경판은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된 백제 무왕이 제석사지 탑에 봉안하였다는 '반야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과 함께 10세기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금동불입상이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금강경판과 사리함이 백제·통일신라 혹은 후백제에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식의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 탑에 이러한 사리장엄구를 봉안한 시기가 후백제가 익산지역을 경영하던 10세기 초라는 점이다.

 

최근 왕궁리 5층석탑 조사에 참여하였던 정명호 전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보고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왕궁리 5층석탑 중수에 참여하였던 선생의 보고서가 익산 왕궁리 5층석탑과 사리장엄구의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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