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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의 황제 송대관 "구수한 청국장처럼 가슴에서 우러난 노래 불러요"

대담= 조 상 진 선임기자 / 전주방송 전속가수로 활동 가요계 입문…전라도 사투리에 대중들은 더 친근감 느껴 트로트 가사는 어렵지 않고 독창성 있어야

 

"니가 기쁠 때 내가 슬플 때 누구나 부르는 노래/ 내려 보는 사람도 위를 보는 사람도 어차피 쿵짝이라네./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

 

서민들이 즐겨 부르는 송대관(67)의 '네박자'라는 노래다. 구수한 목소리도 좋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쿨'해서 좋다. 흔히 '뽕짝'이라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의 노래에는 서민들의 애환이 그대로 녹아있고, 그것이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요계의 정상에 우뚝 섰고 우리 가요계를 이끄는 리더 역할도 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활력 넘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인기와 건강 비결을 듣고 싶었다. 사양하는 인터뷰를 가까스로 성사시켰다. 지난 14일 전북대삼성문화회관에 행사차 내려온 그를 분장실로 찾아가 만났다.

 

- 안녕하십니까? 요즘 굉장히 바쁘시던데 근황부터 들려주시죠.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쁠 겁니다. 마누라 얼굴도 못 볼 정도예요.(웃음) 중국 미국 등 해외 공연도 밀려있고…"

 

- 고향인 정읍에는 자주 다녀옵니까?

 

"태인에는 어른들 산소가 있고 할아버지 3·1탑도 태인고등학교 뒤편에 있으니까, 전북에 내려오면 태인을 슬며시 찾아가죠. 조상의 넋을 기리기 위해 꽃다발도 하나씩 놓고 가고요."

 

- 유난히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강한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저만 고향 있는 사람 같아요. 왜냐면 4인방(트로트 빅4) 중에 저만 전라도고, 태진아는 충청도, 현철과 설운도는 부산인데, 유독 우리 전라도 쪽이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해요. 어디 타관, 예를 들어 제주도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하기 위해 버스에 타고 있는데 막 사람들이 창문을 두드려요. 옆에서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나 고향 사람이야!'그래요. 사인 하나 해주고 나면 또 두드려요. 다른 가수들이 있다가 '송대관 밖에 고향있는 사람이 없구만'이렇게 된 거예요. 딴 사람 보기가 미안할 정도죠."

 

- 최근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듯합니다. TV 드라마에 출연해 좋은 연기력을 보여주고 계시는데요. 연기는 노래와는 좀 다르지 않은가요?

 

"물론 자기 본업에 대해서는 자기만큼 충실하게 잘하는 사람은 없겠죠. 가수가 대사와 함께 연기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카메라가 돌아가면서 상대방 여러 명하고 같이 할 때 내가 미스가 나면 다시 해야잖아요. 두어 번 미스가 나면 제 정신이 아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면 할수록 칭찬이 올라오니까요. 그러나 노래보다 어려워요. 또 반대로 탤런트가 노래를 부른다면 더 어려운 거예요. 만인들 앞에서 노래 부른다는 것이 아랫도리 떨려서 못하는 거라고요."

 

- 이제 할아버지 얘기로 넘어가 볼까요. 독립운동가 후손인데 왜 그동안 자랑을 안 하셨습니까?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하셨지 제가 한 게 아니니까요. 할아버지는 1919년 3월 16일 태인 장날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장을 장꾼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자수성가하신 증조할아버지는 만석꾼으로 금광을 운영하셨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다가 일본인들에게 금광과 땅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할아버지는 군산형무소에서 고초를 겪다 돌아가셨어요. 애국자인 조상 덕분(?)에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서 달걀도 먹어 본 기억이 없어요. 봄엔 새싹 뜯어먹고 소나무 껍질 벗겨먹고…."

 

- 가수 입문은 어떻게 했습니까?

 

"고등학교 다닐 때 갈등이 있었습니다. 공무원 시험이라도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주체할 수 없는 내 끼에 가요계 진출의 꿈을 이룰 것인가. 그런 도중에 전주방송(KBS) 전속가수로 활동하게 됐습니다."

 

- 아니, 지방방송국에 전속가수가 있었다고요?

 

"예, 상당히 앞서 갔죠. 밴드도 있었고. 지역에 다니면서 공연도 하고 그랬는데 거기서 노래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죠."

 

- 서울로 진출하신 계기는요?

 

"전속가수 생활을 하다 전주방송 대표로 서울 시민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노래경연대회에 나갔습니다. 3위를 했어요. 그 다음에 서울 KBS TV에서 연락이 왔어요. 매주 몇 명씩 나와 겨뤄서 1등을 뽑는데 3주 연속 1등을 하면 자동으로 장원탄생이 돼요. 제가 3주 1등을 했어요. 유청씨 아들 유훈근씨(가수 김상희 남편)가 그 프로그램 프로듀서로 있었어요. 서울로 올라오라는데 잠잘 데도 없고…. 고심 끝에 친구들이 양복 한 벌 해주고 여비도 좀 챙겨줬어요. 그것을 어머니한테 드리고 돈 200원 갖고 서울 올라간 거예요. 기차는 무임승차하고 슬리퍼 신고…. 그 때부터 파란만장한 서울 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 1975년에'해뜰날'로 그야말로 쨍하고 떴는데요. 직접 작사를 하셨죠?

 

"레코드사에 들어갔는데 신인가수들에겐 좋은 곡을 안주더라고요. 돈 있고 빽 있어야 하는데 저한테는 찌꺼기만 와요. 몇 년을 허송세월 하다가 안되겠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겠다. 나도 저 정도 작품가사는 능가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중고등학교 시절 책을 많이 봤거든요. 그래서 최초로 쓴 게 '세월이 약이겠지요'에요. 어머니가 너무 아프시고, 그걸 바라보면서 약 한첩 못 사주는 안타까운 마음이었거든요. 전국 차트에 1위로 올라가고, 그랬지만 내 양에 차는 곡은 아니었죠. 그러다 2-3년 있다 '해뜰날'을 썼죠."

 

- 해뜰날은 그 때 참 엄청난 인기였는데요.

 

"그 때 역사가 시작된 거죠. 당시 10대 가수에 이미자씨를 비롯해서 남진 나훈아 등 가요사에 남을 쟁쟁한 분들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싹 쓸어버리고 가수왕이 된 거죠. 최고 인기가수 등 3관왕을 했어요."

 

- 그런데 왜 갑자기 미국으로 가게 됐습니까?

 

"진짜 내 세상을 만났는데, 질곡이 또 생긴 거예요. 우리 직업이 극장식 리사이틀이었잖아요. 전국 다니면서. 그런데 칼러 TV로 바꿔지면서 극장산업(나이트클럽)이 완전히 내리막길이 돼 버렸죠. 직장을 잃어버린 거나 똑같더라고요. 방송국 출연료는 몇 만원밖에 안돼요. 쇼를 해야 되는데 서울에 (나이트 클럽이) 2-3개 밖에 없었어요. 그거 가지고는 도저히 살 수없는 상황이죠."

 

- 잠깐만요. 사모님하고 만난 에피소드가 꽤 재미있던데요.

 

"결혼할 때 처가쪽 반대가 심했어요. 당시 저는 무명가수였으니까요. 아내가 일본 동경에서 유학중일 때 처음 만났는데 제가 그 땐 곱상하게 생겼었어요. 샌님같이,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바람 맞고 전화로 쌍욕을 해댔어요. 그러자 이것 봐라, 남자다운 데가 있네, 그렇게 해서 만났는데 교제 3년하고 결혼을 했어요. 교제 당시 아내 집에 가서 휘파람을 불면 장인 어른이 몽둥이를 들고 나오곤 했죠. 그러다 첫 아이를 임신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해줬죠.(웃음)"

 

- 미국 생활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시 처가쪽이 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어요. 초기엔 직장이 없는 저를 대신해 일어에 능통한 아내가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독립운동가 후손이 기모노 입고 일하는 아내한테 빌붙어 산다는 게 너무 한심해 그 때부터 정신차리고 일을 했죠. 샌드위치 전문점에 슈퍼마켓도 여러 개 운영했고 버지니아에서 쇼핑몰을 구입해 큰 돈을 만졌어요. 그런데 살만해지니까 몸이 아픈 겁니다. 이유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홈식(home sick 향수병)이래요. 그래서 한국에 돌아 온 겁니다."

 

- 바로 돌아와서 재기에 성공했는데요?

 

"요즘 젊은 아이들하고는 달리, 트로트 가수가 다시 와서 재기하기는 힘들었죠. 그렇지만 저는 '혼자랍니다'를 시작으로 '정 때문에''차표 한 장'등 부르는 족족 히트를 했으니까요."

 

- 대한가수협회장을 역임했기 때문에, 대중가요 활성화 문제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요즘 TV에서는 아이돌 가수와 K-pop 등의 영향으로 트로트가 설 자리가 좁아진 듯한데요?

 

"1990년대 후반부터 음악 프로그램 출연자가 아이돌 중심으로 짜여지면서 성인가요나 포크음악 가수들의 무대가 점점 좁아졌죠. 방송국에 여러 차례 시정요구도 했는데 KBS를 제외한 방송은 상업방송이라 시청률하고 직결돼 있어요. 방송국 관계자들이 오히려 사정을 해요. 또 회장으로 있을 때는 전체적인 가요 장르에 대해 신경을 써야 했고요."

 

- 가수 데뷔 45년째입니다. 그 동안 무명의 설움도 있었고 영광의 순간도 있었는데 왜 자신의 노래가 인기 있다고 생각합니까?

 

"대중들의 심리를 잘 꿰뚫어 봐야죠. 옛날에는 누가 잘 울리느냐, 그것이 중요했는데 지금은 그것을 요구하는 시대가 아녜요. 겉보리 흉년시대는 지났어요. 이제는 가사를 즐겁고 재미있게 만들어야 해요. 한번은 신나게 하고, 한번은 약간 복고로 흘러가고, 옷을 자꾸 갈아 입혀주듯이 해야 돼요. 첫째 너무 어렵지 않아야 하고, 둘째 남이 쓰지 않는 용어가 그 노래 속에 들어서 독창력이 돋보여야 돼요. 가령 '끈끈한 정 때문에'처럼 정(情)에다 끈끈한 이란 형용사를 내가 썼는데 그런 특별한 용어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 입담이 보통이 아니고 유머 감각도 뛰어난데요?

 

"저는 처절한 경험담을 이야기하는데 남들은 재미있다고 웃는 거예요. 유머는 순발력이예요. 예능프로그램 (초청이) 밀려있는데 그런 이유 중의 하나는 재미있고, 비방이 아닌 현실적인 얘기를 바로 받아치면서 창의적으로 하니까요. 그 속에는 제가 겪었던 것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요. 가령 쟈니 윤쇼에서 한 말인데요. 미국 뉴욕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할 때 음식에서 파리가 나왔는데 증거인멸을 위해 먹어버렸어요. 손님이 고발을 해서 한 달 영업정지 시키면 저는 망하는 거예요. (손님에게) Can I see?(좀 볼까요?) bean cover, delicious!(콩 껍데기인데, 맛있는데요!) 하면서 파리를 먹어버렸어요. 쟈니 윤이 까무러치게 웃는데, 저는 그게 살 떨리는 불안한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어요. 노래도 그래요. 인생을 달관하다 보면 노래도 삭혀서 나와요. 구수한 청국장처럼. 저는 지금 가슴으로 노래를 부르지, 목구멍으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녜요."

 

- 전라도 사투리가 이쪽 사람들이 들을 때는 구수한데, 다른 지역 사람들은 거북해 하지 않는가요?

 

"그걸 지금까지 다 극복해 왔어요. 결과론을 얘기하자면 지금은 제 말을 더 재미있어 하고 배우려고 그래요. 친하게 지내는 방송국 부장이 표준말을 좀 쓰라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바로 '여보, 현철이가 서울 말 쓰면 나도 쓸께. 가(현철)는 표준말이여, 왜 나만 사투리여' 그랬죠. 그랬더니 얼굴이 벌개지더라고요."

 

·

 

- 태진아씨는 실제로 라이벌 관계입니까?

 

"찰떡 궁합예요. 우리는 아주 친하고 모든 게 설정(컨셉)이에요. 제 인생의 든든한 방파제죠. 10월 14일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태진아와 함께'쏭의 전쟁'공연이 있어요."

 

- 정읍 송대관가요제는 2009년 10월에 이틀간 열리고 말았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안타까운 문제인데, 약간의 정치적인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단풍철에 내장산 관광지를 알리는 좋은 기회인데…. 다시 한번 불을 지폈으면 해요."(이 부분에서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을 아꼈다.)

 

- 항상 활력이 넘치고 젊게 사는데 건강 비결은?

 

"운동에 미쳤어요. 남산에 매일 올라가고, 청계산에도 가고, 또 헬스클럽에 나가 근육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하니까요. 스태미너가 운동에서 나오니까요."

 

- 가요 팬들에게 한 말씀 해주죠.

 

"제가 부르는 노래를 받아주지 않으면 죽은 가수죠. 그런데 저에게 많은 사랑을 주고…. 어떤 분들은 공연장에 쫓아 와서 악수 한번 하고 돌아서면서 '나, 이제 죽어도 소원이 없다'고 해요. 이럴 정도로 제가 사랑을 받는데, 너무나 감사하죠."

 

- 끝으로 전북 도민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은?

 

"저는 정말 전북 도민들에게 빚이 많아요. 전라북도가 없으면 제가 이렇게 탄탄하게 되지 못했을 거예요. 옛날에 가수왕을 우편으로 집계할 때 전라북도내 우체국에 우편엽서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제게 사랑을 주었죠. 그런 사랑을 받고 살아서 앞으로 살아가면서 답례를 하려고 합니다.

 

▲ 가수 송대관과 본보 조상진 선임기자가 담소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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