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김은정 선임기자 - 쿠바영화 통해 혁명·예술 결합시킨 휴머니즘 느껴 전주영화제서 '아랍권 영화' 기획, 새로운 가치 발견 전주영화제 규모 늘리기보다 내실 다지기 노력해야
2004년 전주국제영화제의 이슈는 단연 쿠바영화였다. 그해 특별전이란 이름으로 엮어낸 쿠바영화는 열일곱 편. 아름다운 영상과 혁명정신으로 무장한 영화에 관객들은 기대 이상으로 감동했으며 열광했다. 쿠바는 한때 연간 1백5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어냈을 정도로 영화강국이었지만 한국관객들에게는 오랫동안 미지의 대상이었다. 비수교국의 굴레와 정치적 장벽이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쿠바특별전은 그런 점에서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실험의 장이었다.
실제로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지난했던 쿠바영화특별전은 전주영화제에 특별한 역사를 안겼다. 그 역사를 있게 한 사람, 영화평론가 임안자 전 전주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70)이다. 그는 쿠바영화 말고도 마그렙영화나 소비에트영화, 터키영화, 중앙아시아영화 등 보석 같은 영화들을 전주영화제와 극적으로 조우하게 했던 주역이다. 사실 낯설지만 빛나는 영화를 발견해내는 전주영화제의 가치는 이들 영화들로 온전히 실현될 수 있었다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69회 베니스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을 때, 일찌감치 부터 김기덕표 영화를 지지했었던 그가 생각났었다.
진안이 고향이지만, 1960년대에 한국을 떠나 스위스에 살고 있는 그를 9월 말, 전주의 한옥마을에서 만났다.
한국 방문은 3년만이다. 부산영화제의 공식초청을 받아 내친김에 두 달 동안의 여행 계획을 세워 방문한 여정이다. 올해 은퇴한 남편과 함께 한 이번 여행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다.
그는 2008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영화에 관한 모든 공식적인 일을 모두 정리했다. 그렇지만 인터뷰 내내 그의 관심은 영화와 영화제에 놓여있었다. 전주영화제를 향한 그의 애정은 여전히 크고 깊었다. 지면에 옮겨낼 수는 없으나 그만큼 귀 기울여야 할 조언이 적지 않았다.
-선생님을 뵈니 쿠바영화특별전이 다시 생각납니다. 참 일이 많았었죠.
"말로는 다 못하죠.(웃음) 지금 생각하면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우리나라와 아무런 교류가 없었던 나라잖아요. 그래서 필름 수급도 어려웠고, 영화 몇 편은 포대 자루에 필름을 담아 전달받기도 했어요. 게다가 지프(JIFF)에 참석하기로 했던 다니엘 디아즈 토렌즈 감독과 페르난도 페레즈 감독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발이 묶여 한국입국이 불투명했다가 겨우 들어왔지요."
-그렇게라도 쿠바영화를 가져와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제가 쿠바영화를 본 것이 1976년 페사로 영화제에서였어요. 영화 두 편을 봤는데 그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이 충격적이었어요. '언젠가 쿠바 영화를 소개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30년이 지나서야 현실로 이뤄낼 수 있었죠."
-쿠바영화의 어떤 점이 선생님의 마음을 잡았나요.
"쿠바영화는 정치성이 강합니다. 그러나 제가 좋아하는 것은 그런 정치적인 알레고리 때문이 아니에요. 쿠바 영화는 역사의 전진을 가로막는 구습을 타파하기 위해 카메라를 무기로 삼고 있습니다. 혁명과 예술의 이상적 결합, 그 미학적 모험을 시도한 쿠바 영화 에서는 진한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죠. 제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쿠바영화 말고도 마그렙(이슬람 세계의 서단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의 지방) 영화나 중앙아시아 영화까지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셨습니다. 쿠바와 마그렙 영화는 특히 전주영화제가 발견한 보석으로 평가받는데 이 영화들이 모두 만만치 않은 절차를 거쳐야 했지 않나요.
"2005년 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을 때 내가 영화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되더군요. 영화제 자체를 빛나게 하는 일이 필요했지요. 그런데 전주영화제는 경제적으로 한계가 있어 노력과 열정으로도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어요. 그래서 유럽의 영화제에서 간간히 만나는 고유한 문화성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영화들을 주목했습니다. 주목 받지 못한 것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가치를 높이 사는 전주영화제라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죠. 좀 어려운 절차를 거쳐야했지만 고집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들 영화 대부분이 주류 영화가 아닙니다. 세계사적 질서에서도 주변부로 밀려나있는 나라들이구요. 그런 점에서 보면 선생님께서 지켜온 철학이나 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쿠바도 그렇고 마그렙 영화를 선택한데는 분명한 계기가 있었어요. 미국의 무역센터 폭발사건 이후 아랍권에 비난이 쏟아졌죠. 매스컴을 통해 벌어지는 반 아랍 정책을 대하면서 그들의 문화 전반까지 매도당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랍의 무궁무진한 역사나 그들의 미학, 그들의 노래, 그들의 삶을 읽어내는 일이 필요하더군요. 영화는 그 통로였습니다. 9.11사태로 불신과 차별, 마치 테러의 온상처럼 인식되고 있는 이슬람 종교 문화권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고 싶었죠."
-이런 영화들을 고르고 협의해 영화제프로그램으로 기획하기까지 해결해야 할 일이 많지요. 돈으로만 되는 일도 아니어서 프로그래머의 역량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경험도 답이 될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참 흥미로워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일도 인적 네트워크로 해결되는 일이 많거든요. 그럴 때마다 영화제의 기본은 역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곤 합니다. 특히 연륜이 짧은 영화제일수록 교류를 갖고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과제일겁니다."
-선생님의 인적 네트워크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정도로 그 폭이 넓고 깊습니다. 그런 인맥을 어떻게 쌓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군요.
"1989년 8월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수상한 배용균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계기로 유럽권에서 한국영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배감독 인터뷰를 계기로 뮌헨에서 열렸던 임권택 감독님 회고전에도 참여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한국의 영화전문지에 글을 쓰게 되었어요. 한국영화를 유럽에 소개하고 또 유럽의 영화를 한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면서 많은 영화제에 참여하고, 그렇다보니 영화인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죠. 그래서 한국 영화감독들이 영화제를 찾았을 때 통역이나 프레스 지원역으로 유럽영화계에 소개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인들은 선생님을 유럽에 한국영화를 소개한 주역으로 꼽습니다. 실제로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셨고, 덕분에 한국영화 바람을 일으켰죠.
"영화제를 다니다보니 한국영화를 소개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더군요. 임권택 감독님과는 여러 가지로 인연이 깊은데, 덕분에 스위스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네 번의 한국영화 특별전을 열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일본영화가 고전으로 넘어가고 중국영화가 뜨기 시작할 때였는데 이 기회에 한국영화를 좀 더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시점으로 부터로 치자면 23년이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의 유럽진출과 선생님의 활동이 온전히 같은 연상에 놓여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어요. 사실 저는 영화공부를 늦게 시작했습니다. 서른한 살에 대학에 다시 들어갔으니까요. 결혼과 개인생활 때문에 영화평론 등의 글쓰기나 영화제 관련 업무를 한 것은 그보다도 한참 뒤의 일이예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오히려 늦게 시작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좀 더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 안에서의 활동도 그때부터였겠군요.
"그렇죠. 1998년에는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에서 한 학기분 강의도 했어요. 생각해보면 참 의미 있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당초 저에게 주어진 것이 이론보다는 실질적인 경험, 국제적인 영화의 흐름을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한 학기는 너무 길어서 두 배로 압축해서 수업을 진행했어요. ' 유럽영화의 역사'였는데 스위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직접 필름으로 받은 영화를 보고 함께 공부했어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제가 놀랐던 것이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영화이론이나 이미 정립해놓은 영화사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한편의 영화, 한명의 감독을 제대로 알려면 그 시대의 사회적 조건, 정치적 조건, 역사의 흐름, 철학적 배경 등을 읽어내는 지식과 눈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더군요."
-부산영화제와의 인연은 전주영화제보다 훨씬 먼저였지요.
"부산영화제가 만들어진 해에 베를린영화제에서 만난 관계자들로부터 제안 받았고, 그때부터 2003년까지 8년 동안 고문으로 일했습니다. 부산영화제도 초창기에는 경험이 없으니 어려움이 많았죠. 고문이라 사실 할 일이 없었는데, 크고 작은 교류와 대형스크린 프로젝트, 국제영화평론가협회를 부산영화제와 연계시키는 일을 했어요. 2002년에 전주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게 된 것을 계기로 그 다음해부터 전주영화제 일을 하게 되었죠."
-부산영화제에 비해 전주영화제는 규모도 작고 연륜도 짧은 한계가 있는데, 어땠습니까. 수많은 영화제를 다녀보신 입장에서 당시에도 전주영화제가 가능성이 있어보였나요.
"2002년 전주영화제의 프로그래머들이 그만두면서 상황이 매우 어렵더군요. 당시 서동진 프로그래머가 위기를 참 잘 극복했던 것 같아요. 그 짧은 시간에 좋은 프로그램을 구성해놓은 것을 보고 능력 있고 좋은 프로그래머라고 생각했습니다. 2003년에는 옵서버로 참여했는데, 20여 년간 동·서유럽의 크고 작은 영화제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던 오랜 경험이 전주영화제를 들여다보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인적, 조직체의 약점이 보이더군요. 국제영화제 경험이 적은데다 경제적 여건이 좋았던 것도 아니어서 빠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영화제의 가능성이 보이고 꼭 살아있어야 할 존재가치가 돋보이더군요. 전주라는 도시의 정체성도 한몫했을 겁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모든 일이 쉽지 않은 과정을 갖고 있었지만 그 순간순간이 모두 빛나는 결실이지 않았는가하는. 전주영화제를 떠나신 것이 2009년이었나요.
"생각해보면 행복한 시간이었죠. 50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고, 2008년 뇌경색으로 활동을 정리할 때까지 정말 바쁘게 살았어요. 2008년 전주영화제의 중앙아시아 특별전을 다 준비해놓고 쓰러졌는데, 다행히 거의 완치되어 다음해에 전주영화제에 올 수 있었죠. 2009년 폐막식장에서 공로패를 받을 때에는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폐막식장에서 전주국제영화제는 사람으로 따지면 어렵고 가난하게 성장했지만 스스로 이만큼의 위치까지 올라온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자수성가한 전주영화제의 갈 길이 여전히 편해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쉬운 일은 없습니다. 일이 잘되면 사람들이 안심하고 쉽게 생각하지요. 그럴 때일수록 더 긴장하고 노력해야합니다. 저는 전주영화제가 규모를 늘리기보다는 탄탄한 영화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주영화제는 좋은 덕목이 많죠. 독립이나 대안영화와 같은, 실력은 있으나 미처 발견되지 못한 감독과 영화들에게 전주영화제는 희망입니다. 그것을 꼭 지켜갔으면 좋겠습니다. 새집행위원장님을 맞았으니 기대가 더 큽니다."
그는 떠나야할 시기에 전주영화제를 떠나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가 전주영화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해 줄(?) 일은 아직도 적지 않다.
인터뷰 말미에 겨우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건강이 허락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나쁘지는 않겠다"는 답을 얻었다. 그리고 덧붙인 이야기. "사실 다 준비해놓고 못 가져온 영화들이 있어요. 그루지아 영화지요. 전주영화제가 꼭 가져와야 해요. 아프리카 영화도 있고."
올해 칠순을 맞은 그의 눈빛이 빛났다. 전주영화제가 그를 언제라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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