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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소리가 들리는 길

초등학교 다닐 때 나는 강 길을 걸어 다녔다. 6·25전쟁 직후 산판이라는 게 있었다. 산에 있는 소나무를 다 벌목해 갔다. 지에무시라는 전쟁 용 트럭이 비탈지고 험한 산들을 올라 다니며 베어진 소나무를 실어 갔다. 힘이 센 지에무시는 웬만한 곳을 어디든 다 갔다. 나무를 실은 지에무시는 우리가 다니던 강 길에 새로운 길을 내며 지나다녔다. 그러나 그 길은 금방 큰 비로 무너지고 패여 작은 방죽이 되어버렸다. 우리들은 여전히 우리가 우리 발길로 낸 길을 걸었다. 우리가 다니는 길에 구장 네 솔밭이라는 넓은 강변이 있었다. 솔밭에는 어른들 팔뚝보다 조금 큰 앙당앙당 한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키도 작았다. 큰 돌과 자갈과 모래로 된 그 길에는 우리 키보다 조금 작은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 곳으로 우리가 다니는 길을 나 있었다. 오솔길이었다. 작년 풀들이 쓰러지고 새 풀이 자라면 그 밑에 키 작은 가랑나무 잎이 피어나고 가랑나무 잎 뒤에 물새들이 마른 풀로 집을 짓고 알을 까 새끼를 길러갔다. 작은 소나무, 검은 바위와 작은 자갈들, 그리고 모래와 풀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은 그림이었다. 바람이 불고 풀들이 흔들리는 사이로 아이들의 까만 머리통이 보였다. 내가 기억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전주로 와서 살면서 나는 친구 한명과 함께 화산 공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서신동 롯데 아파트에서 예수병원까지 걷는 길은 흙길이다. 오르고 내리고 평평하게 걷는 길이 아주 적당하다. 숨이 차는가 싶으면 내려가고 내려가는가 싶으면 또 작은 비탈길을 오른다. 반듯한가 싶으면 구부러지고 구부러지는가 싶으면 금세 또 반듯하다. 오르고 내리고 구부러지고 휘돌고 반듯하고 평평한 그 길에 참나무 잎이라도 떨어져 있는 가을이면 길은 그냥 그대로 그림이고 사진이고 시고 노래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다녔다고 생각하면 길은 역사가 된다.

 

꿩이 살더니, 꿩은 보이지 않는다. 다람쥐가 살더니, 다람쥐도 보이지 않는다. 청설모가 이 쪽 가지에서 저쪽 가지로 뛰어 건넌다. 청설모와 다람쥐는 공생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도둑고양이들 때문에 꿩이 살지 못하는 모양이다. 생태계는 그렇게 변해 간다. 봄이면 그 길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생강나무 꽃이 피고, 진달래도 피고, 조팝나무 꽃도 피고 똘배 꽃도 피고, 이팝나무 꽃도 피고, 때죽나무 꽃도 핀다. 국수나무 꽃도 피고 자귀나무 꽃도 피고, 산벚 꽃도 피고, 개복숭아나무 꽃도 피고, 아카시아 꽃도 핀다. 그 길이 지난 여름 큰 태풍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오래 된 참나무 아키시아나무들이 이리저리 쓰러지고, 넘어지고 찢어지고, 꺾이고, 부러졌다. 아름드리 참나무들이 쓰러져 엄청난 뿌리를 하늘로 쳐들고 있는 모습은 나에게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전쟁 영화 세트장 같은 참혹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길에 가을이 왔다. 참나무 잎이 지고 하얗게 찢어진 상처는 아물어가고 숲은 오랜 후에 다시 상처 받은 몸과 영혼을 추스르고 가다듬고 정리해 갈 것이다. 인생도 그러하다. 나는 그 길에서 새벽길이라는 산문시를 썼다.

 

'까만 오디가 떨어져 있습니다. 툭, 떨어진 모양 그대로입니다. 흰 새똥이 떨어져 있습니다. 똥 부근 흙이 젖었습니다. 거미줄이 얼굴에 걸립니다. 미안하게도 오늘 제가 이 길에 처음 인가 봐요. 때죽나무 흰 꽃잎이 그림자도 없이 가만히 떨어져 있습니다. 바람이 없었나 봐요. 새가 걸어갔습니다. 왼쪽 가운데 발톱하나가 빠졌나 봅니다. 새가 마른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바스락 소리, 배가 고픕니다. 가만 가만 걷는 내 발소리가 들립니다. 다 버리고 내 발소리만 데리고 어디만큼을 갑니다.' ·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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