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최명표가 본 김동수 시집 '말하는 나무'
김동수의 이와 같은 깨달음은 이 시집에 무더기로 묶여 있는 '마음'시편에 힘입은 것이다. 다소 거칠게 요약한다면, 지금까지 김동수의 시작품들은 사모곡에 다름 아니었다. 어머니란 존재는 너무나 편재적이어서 아무리 시인의 경험이 독특하다고 할지라도, 따로 범주화하기에 난망한 것이 사실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건대, 어머니가 누천년간 획득한 심상은 "당신은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부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부재를 인정하고 나면 아들의 시선은 세상으로 외연을 넓혀 '풍경과 하나'('공')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의 산물(一切唯心造)인 셈이다.
그에게서 시적 나아감의 경과를 찾아보는 일은 의미로운 시도이다. 다들 알다시피, 김동수의 본업은 시를 가르치는 문학교사이다. 또 그는 이 시집의 서문에 해당하는 작품에서 '나의 시는 내 영혼의 사당'('詩')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므로 그가 시를 규정하는 안목이야 수년간의 교수행위 속에서 혹은 30년에 걸친 시작 경험에서 절로 내면화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가 연전에 펴낸 이론서 '시적 발상과 창작'(천년의시작, 2008)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아래의 인용 작품은 후자에 속한다.
'차를 마신다
내 몸과 따뜻하게 하나가 된다
싸늘한 아침공기가 방안을 엿보고 있다
저도 한 잔의 차가 그리웠던지
슬금슬금 문틈으로 기어든다
찻잔의 온기들이 자리를 조금씩 내어주자
미안한 낯빛으로 다가와서 앉는다
먼저 와 있던 두 손들이 그를 감싸
차와 나, 창밖의 것들이 하나가 된다
천천히 밝아오는 아침, 눈부시다' ('차 한 잔' 전문 중에서)
김동수의 시와 시론을 명증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그가 자신의 시를 가리켜 '전일성을 꿈꾸는 인간 본연의 그리움'('시인의 말')이라고 규정한 바를 떠올리면, 위 작품이 지닌 의미는 각별하다.
어느 날 차를 마시다가 시인은 우주와 하나가 된 체험을 느낀다. 시인이 '차와 나, 창밖의 것들이 하나가 된다.'는 사실에 전율하니, 희부염하게 밝아오는 여명조차 '눈부시다'. 그의 눈부신 성취는 시작에 나선 1982년부터 줄기차게 연마했던 시력의 당연한 결과물이다. 바야흐로 김동수는 '저 우주의 푸른 힘'('무덤')을 체감하고 있다. 그가 '골짜기를 덮던 가슴'('가을 숲')을 헤친 모습이 기다려진다. 아마 그는 위의 시편에서 획득한 '전일성'을 발휘하여 "학처럼 솟은 말간 아침"('아침 經 2')을 노래할 터이다.
중견시인의 시를 읽노라면 신예 작품에 부족한 연륜을 구경할 수 있다. 그들은 인생을 관조할 나이에 이르렀기에, 시의 편편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와 경험이 짙게 우러난다. 그것만으로도 중견들의 시작품은 귀중한 가치를 띤다. 요새처럼 다들 잘났다고 허풍을 떠는 세상이라면, 그들의 시가 지닌 값어치는 배가된다. 김동수는 지금까지 시적 성과에 기초해 마음의 본질적 국면을 문제삼으면서 새로운 진경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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