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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해양문물교류의 허브

▲ 곽 장 근

 

군산대 사학과 교수

우리나라는 바다로 갇혀있지 않고 바다로 열려있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은 바닷길로 해양문물교류가 활발했다. 옛날고속도로인 강과 바다는 일찍부터 문물교류의 큰 통로였다. 우리나라에서 강과 바다를 하나로 묶어주는 천혜의 교역망이 잘 갖춰진 곳이 전북이다. 그리하여 전북의 서해안이 해양문화의 메카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현재까지 전북에서 발견된 40여 개소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대부분 서해안에 모여 있다. 군산지역의 패총에서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양문화를 비롯하여 내륙문화의 요소도 함께 확인되어, 전북이 신석기시대부터 해양문물교류의 허브였음이 입증됐다.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 인천강의 내륙수로와 해상교통망이 거미줄처럼 잘 구축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나라에서 철기문화의 전래와 해상교통의 발달로 패총의 규모가 갑자기 커진다. 군산 개사동 패총은 그 규모가 100m 내외로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군산의 역사책으로까지 불리는 군산지역의 패총은 100여 개소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다. 아마도 군산이 소금생산을 기반으로 발전했던 해양경제의 보고였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러나 군산지역 패총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한 차례의 발굴조사도 추진되지 않아 그 존재가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금강과 동진강하구에 마한의 지배층 무덤으로 알려진 말무덤이 밀집되어 있다. 군산지역에는 17개소의 말무덤과 관련된 분묘유적이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 밀집도가 전북에서 가장 높다. 최근 군산대 캠퍼스 내 말무덤에 대한 학술발굴에서 그 의미가 마한의 분구묘로 파악됐다. 마한의 말무덤과 패총이 많은 군산지역에는 해양경제를 토대로 발전했던 마한의 소국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의 해양문화를 가장 일목요연하게 보여준 곳이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이다. 백제와 가야, 왜가 연안항로를 따라 항해하다가 잠시 들러 무사항해를 기원하며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고창 봉덕리에서 중국제 청자와 일본계 토기가 출토됐는데, 당시 한·중·일의 고대문화가 해상교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됐음을 암시해 줬다. 백제가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뒤 후백제까지 동진강하구의 가야포 등 거점포구를 통해 국제교류가 빈번했다.

 

삼국시대 해양문화의 심장부인 전북의 서해안은 한 동안 전쟁터로 그 무대가 바뀌었다. 당나라 소정방 13만 군대가 상륙했던 기벌포와 백제부흥군이 나당연합군과 치열하게 격전을 벌였던 백강전투, 676년 당나라와 신라수군이 최후의 해전을 펼친 곳도 전북의 서해안으로 추정된다.

 

고려는 해상왕 장보고가 구축해 놓은 해상교역망을 그대로 계승해 해양강국으로 발전했다. 송나라 휘종이 200여 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했는데, 군산도에서 김부식 주관으로 영접행사가 열릴 정도로 당시 국제관문으로 번영을 누렸다. 현재 선유도 망주봉 주변에는 숭산행궁과 군산정, 오룡묘, 자복사 등 국제해양문화유산이 잘 남아있다.

 

조선시대 해양활동을 금지하는 해금정책과 공도정책으로 해양문물교류가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전북의 서해안은 진성창과 안흥창 등 조창과 조운선으로 여전히 해양문물교류의 허브로 융성했다. 전북의 서해안에 찬란히 꽃피웠던 해양문화를 재현하려는 새만금국제해양관광단지와 새만금신항만사업이 계획대로 추진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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