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 년 전 12월 어느날인가는 첫눈이 아주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괜히 싱숭생숭해져서 집으로 곧장 가지 못하고 대학로를 그야말로 정처없이 서성거렸지요. 그러다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백미현의 〈눈이 내리면〉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면 떠오는 모습 그대의 그 까만코트 주머니에 내손을 넣고 마냥 걸었지 첫눈 올 때면 무작정 우린 만났지... 백미현 특유의 부드럽고 청아한 음성과 어우러진 그 노래의 구절구절이 내 가슴 속에 흰눈을 아주 그냥 펑펑 쏟아붓고 있었던 겁니다.
그날 나는 레코드가게에서 그 노래가 담긴 LP와 맥주 몇 병을 사들고 자취방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밤이 늦도록 〈눈이 내리면〉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물론 간간 이정석의 〈첫눈이 온다구요〉와 이선희가 부른 〈겨울애상〉도 턴테이블에 얹었지요. 하얀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로 끝나는 이문세의 〈옛사랑〉과, 저 유명한 〈러브 스토리〉의 주제곡인 〈Snow Frolic〉도 다섯 번씩은 족히 들었을 겁니다. 창밖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고, 맥주에 취하고 음악에 취해서 나는 새삼스럽게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렸고, 불확실한 미래에 몸을 떨면서도 이 아름다운 세상에 생생히 살아 있음에 또한 무한히 감사를 드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게 12월이었는데도 나는 예나 지금이나 딱 한 달만 꼽으라면 11월입니다.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이지요. 푸른잎도, 울긋불긋 요란하던 단풍도 웬만큼 지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 겨울을 기다리게 하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11월만 되면 12월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하루하루 그저 설레는 것이지요. 확실히 뭔가를 기다리는 건 가슴벅찬 일인가 봅니다. 특히 이 11월은 5년 주기로 찾아오는 12월 '그날'이 예정되어 있어서 더 각별합니다. 지난 5년 동안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는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다음달에 있게 될 '그날'을 내내 기다려 왔던 것이지요.
돌이켜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저린 무릎을 두드려가며 어둡고 긴 터널을 견뎌왔습니다. 세상이 하도 위선투성이라 그랬는지 첫눈 한번 제대로 쏟아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꾹 참고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12월이 성큼 와서 팍팍하기만 했던 모든 사람들이 '사람사는 세상', '사람이 먼저인 세상'의 희망을 벅차게 안고 활짝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어느날 온누리에 첫눈이 펑펑 내리면 나는 또 〈Tombe la Neige〉와 〈눈이 내리면〉에 밤새도록 푹 젖어들고 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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