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전북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북리마을에서 신라토기가 발견됐다. 신라 무산현이 설치된 곳으로 정감록에 삼재를 피할 수 있는 명당 중 명당이다. 아직껏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성격을 예단할 수 없지만 일단 신라고분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6세기 이전에 이미 신라가 백두대간을 넘어 진안고원으로 진출했음을 증명해 주었다. 백제의 웅진기 이후 백제와 신라의 간선교통로는 무산현 동쪽 백두대간의 덕산령을 넘어 성주와 대구를 거쳐 경주까지 이어졌다.
진안 용담댐 구제발굴에서도 신라토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진안 황산리 가야고분에서 가야?백제토기와 공반된 상태로 출토되어 많은 관심을 모았다. 진안군 안천면과 금산군 추부면에서 신라계 유물이 신라고분에서 상당량 출토됐는데, 그 시기는 대체로 6세기 중엽 경으로 비정됐다. 진안고원 일대에서 6세기 전반기 이른 시기부터 등장하는 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신라의 진출을 암시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일제강점기 때 만든 나제통문은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갑자기 정치적인 불안에 빠지자 이를 틈타 장수가야가 진안고원 일대에 대규모 축성과 봉수망을 구축한다. 이 무렵 신라도 진안고원에 큰 관심을 보여 한 동안 장수가야와 갈등관계에 빠진다. 진안고원을 차지하려고 삼국이 치열하게 각축전을 펼쳐 백제와 가야,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한다.
달리 신선의 땅으로 유명한 운봉고원은 신라의 모산현이 설치된 곳이다. 최고급의 철이 생산되던 철의 왕국이자 백제와 가야를 연결해 주던 간선교통로의 관문이다. 삼국시대 때 운봉고원의 철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를 중심으로 대가야, 소가야가 앞 다투어 최고급 위세품을 운봉가야에 보냈다. 그런데 백제와 가야 연합군이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신라가 운봉고원을 복속시켰다. 이를 계기로 백두대간에서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 한 동안 형성되었다. 남원 봉대리 신라계 무덤에서 삼국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어 고고학 자료로 운봉고원의 역동성을 방증해 주었다.
백두대간에서 최고의 격전장이 신라 아막성이다. 백제는 무왕 3년부터 아막성을 차지하기 위해 신라와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당시 20년 넘게 계속된 아막성 전투에서 백제가 승리함으로써 백두대간을 넘어 운봉고원을 다시 백제의 영역으로 예속시켰다. 신라문화유산의 보고인 진안고원과 운봉고원은 삼국의 역사와 문화가 잘 응축된 야외박물관이다.
지난 7월 강원도 영월읍에서 전국 십승지지 읍면장이 한 자리에 모여 십승지지의 발전방향과 협력방안을 모색했다고 한다. 이제부터라도 진안고원과 운봉고원을 무대로 찬란히 꽃피웠던 전북의 신라문화유산을 찾고 알리는 데 학계와 행정당국의 큰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린다. 그럴 때 전북의 역사와 문화가 올곧게 자리매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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