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가 돌아왔다. 영화 '남영동1985'에서 차마 화면을 오래 보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고문 희생자의 모습으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가 방현석의 글을 빌어 다시 사람의 마을로 돌아왔다.
"사실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좀 더 잘 보여주기 위해 픽션이 동원됐을 뿐이다. 나는 이 소설이 백 퍼센트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일을 여는 집』 등 우리 현대사의 순간들을 촘촘하게 포착한 수작으로 많은 독자에게 기억되고 있는 방현석 작가가 9년만에 발표한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는 1년 전에 작고한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삶과 투쟁을 온전하게 담아낸 평전소설이다.
영화 '남영동1985'가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수없이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민주화운동가 김근태에 주목한다면 방현석의 소설은 우리 현대사 굵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김근태의 전면모를 씨줄 날줄로 엮어간다. 늘 조용하고 신중한 신사의 이미지인 김근태에게도 개구쟁이 유년 시절이 있었고, 처음부터 사회의식에 가득 찬 투사가 아니라 그 시절의 많은 가족처럼 어려운 집안살림과 진로로 고민하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대목은 묘한 위안을 준다. 소설 중간 중간 인터뷰 형식의 증언들은 픽션인 소설에 사실감을 더해주는 효과적인 장치로 작동하며 우리 현대사의 격동적인 순간들을 불러낸다. 그 한복판에 늘 김근태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내내 수배자 신세였던 김근태가 전두환 정권 그 살벌한 공포정치에 대항하여 공개민주화운동 조직인 민청련 조직을 띄우고 그 의장을 맡은 것은 정말 대담한 용기였다.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0여일 간 가해진 고문은 그를 꺽어 민주화운동을 말살하고자 했던 군부정권의 기획된 시나리오였으나 김근태는 그 '짐승의 시간'을 낱낱이 기억하고 폭로하여 결국 전두환정권이 몰락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재야 민주화운동의 대부', '시대의 양심'이라는 별칭은 그때부터 그를 붙어 다녔으나 그가 마냥 지사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사회가 수구보수세력이 압도적 우위를 갖는 사회이며 가장 넓은 국민전선-민주대연합을 유지할 때에만 진보세력이 전진할 수 있다는 입장을 놓지 않은 대단한 현실주의자였다. 그 현실주의를 떠받치는 것은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의 면모였다.
김근태가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노무현 대통령과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며 아파트분양가 원가공개 공약 관철을 요구한 일, 또 국민연금 주식투자를 막아내기 위해 싸운 일은 물론 여권의 대표적 정치인이면서도 노무현정부가 추진하는 한미FTA에 반대하며 국회에서 단식농성을 한 것은 당시 정치권에서 비웃음을 샀지만 역사의 긴 안목에서 보면 "김근태가 옳았다."
그 원칙의 한편으로 노사의 사회적 대타협을 추구하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불화, 갈등으로 사적으로는 서운함도 적지 않았으련만 노무현 대통령이 2009년 검찰 수사를 받으며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괴로워 할 때 김근태 홀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의 본질은 정치보복"이며 "검찰이 스스로 독립을 포기하고 권력에 굴종한다면 그 최후는 철저한 국민의 외면일 것"이라고 비판하는 개인성명을 냈다.
유불리, 개인 실속을 따지며 조변석개하는 정치인이 무수한 때에 김근태는 정말 '바보' 정치인이었다. 그가 우직하게 지키고자 했던 '원칙'의 길을 수많은 이들이 비웃고 지나갔다. 한없이 부드럽던 김근태의 손도 이제 온기가 사라졌다.
김근태는 죽음 직전 쓴 글에서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고 호소했다. 그렇게 김근태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시대의 요청에 최후의 순간까지 성실하게 응답하고자 했다.
2012년을 점령하라던 그의 마지막 읍소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 참혹한 패배의 끝에서 세상 너머 김근태가 이제 남은 우리를 하나하나 호명하고 있다.
"희망을 의심할 줄 아는 진지함,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성실함, 대안이 없음을 고백하는 용기, 추상적인 도덕이 아닌 현실적인 차선을 선택해가는 긴장 속에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1995년 김근태)
※이재규씨는 '희망과대안전북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고 김근태 선생이 1989년 재야운동의 총결집체인 전민련 정책위원장일 때 정책위원으로 일하며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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